북적 물자 수락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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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최근의 수재와 관련, 북한적십자위원회의 물자제공 제의를 한적이 수락한 것은 남북관계 발전의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와 유사한 제의는 그동안 남북 간에 여러 차례 있었으나 상대방의 거부로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50, 60년대는 주로 북한측이 제의해 우리 쪽이 거부했고, 경제력이 우세한 70, 80년대는 우리측 제의에 북한이 거부하는 편이었다.
이번의 경우는 경제력이 약한 북한이 제의했기 때문에 우리가 국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수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한적의 수락은 제의와 거부로 일관돼온 남북 간의 부정적 패턴에 대한 재부정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가 있다.
북적 물자를 우리가 접수하는 것은 우리의 물자가 부족하거나 수재민구호나 수재복구를 자력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몇 가지 경제지표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북한측의 물자제공 제의를 받아들인다해서 우리의 경제력이 북한보다 떨어진다거나 물자가 북한보다 부족하다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민총생산(GNP)의 경우 82년에 6백57억 달러(한국)대 1백36억 달러(북한)로 4·8대 1이던 것이 83년엔 한국이 7백53억 달러인 반면 북한은 1백45억 달러로 5·2대1로 오히려 차가 더 벌어졌으며, 주민생활 수준을 가능할 수 있는 1인당 GNP만해도 83년 기준 1천8백억 달러(한국)대7백65달러(북한)로 2·5대1의 격차를 나타내고 있다.
더우기 우리의 경제 성장율이 9·5%(83년 기준)에 이르는 반면 북한은 2%정도 밖에 안되어 국력의 차는 해가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경제력을 이렇게 비교해보면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고 도와줄 수 있는 처지인지는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분단 당시만 해도 중공업시설의 90%가 북한지역에 편중되고 지하자원도. 훨씬 많이 갖고 있어 경제개발에 유리한 입장에 있던 북한은 경제정책의 실패, 과도한 군사비지출 등으로 만성적인 식량난, 에너지부족, 수송력 낙후, 외채상환 능력상실, 기술 난에 빠져 있다는 것은 널리 세계에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북한이「합영법」이란 것을 만들어 서방세계의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이기로 한 것도 한마디로 이른바 자력갱생 방침에 따른 경제난국에서 탈피하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국과 북한의 경제력 격차는 산업화의 원동력이랄수 있는 발전설비용량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한국이 1천3백12만㎞인데 비해 북한은 5백74만㎞로 일조 지하자원을 빼놓고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한국이 북한보다 우위에 있다.
북한이 제공하겠다는 쌀, 천, 시멘트, 의약품의 경우는 어떤가.
쌀 생산량은 한국이 5백40만t이고 북한은 2백12만t으로 2·5대1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시멘트도 2천3백45만t대 8백60만t으로 2·7대1의 생산량 차이가 난다.
우리의 경제규모에 비추어 북한이 제공하겠다는 쌀5만섬은 우리측 쌀 하루 소비량의 반일분에 불과하고 시멘트10만t이란 것도 한 양회공장의 3일분 생산량에 지나지 않는다.
더우기 천의 경우 북한에서 생산하는 천을 입고 다닐 사람이 한국에 몇 명이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측이 최근 국제적십자 연맹의 원조제의를 사양했던 것도 우리의 자력복구, 자력구호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북한물자의 접수를 수락한 것은 지금까지 냉전구조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남북관계에서 대화의 재개를 비롯하여 남북 간의 경제·기술·문화의 교류와 인적왕래의 길을 트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따라서 북한은 이번의 물자제공을 한국인의 반공의식을 이완시키거나 자기네 경제력의 과장 따위의 정치선전에 이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면 남북관계의 발전은 또다시 좌절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번 남북적십자간의 물자수수를 환영하면서 오늘의 우리 상황에서 이 같은 물자의 무정수수는 상호간에 공연한 부담을 준다는 점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 같은 사업은 경제원칙에 따른 비즈니스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곧 경제교류라고도 할 수가 있다.
그래야만 서로 균형 된 거래가 이루어지고 따라서 남북관계가 좋게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동-서독의 경우는 이 같은 형태의 물자 무상제공은 없었다. 다만 우편(소포)거래와 인적왕래가 가능하기 때문에 개인 단위로, 또는 사회단체 단위로 특별한 절차 없이 돕고 도움 받는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 물자수수는 앞으로의 남북간의 평화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계기로 승화될 때에만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남북한에서 이루어지는 상대방에 대한 왜곡선전이나 교육이 이를 계기로 수정돼야한다.
또 북한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우리측이 이를 도와주어야 하고 북한도 이를 대국적인 견지에서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할 때 우리민족의 공동체 의식과 남북의 동질성이 회복,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번을 계기로 남북이 상호간의 위협을 제거하고 대화와 교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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