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삐뚤삐뚤 쓴 일기장 버리지 마세요 … 디자인 보물 될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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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나’ ‘너’ ‘우리 가족’…. 이런 글씨들을 삐뚤삐뚤하게 쓴 아이의 받아쓰기 공책이나 그림과 함께 글씨를 써둔 그림일기 등을 함부로 버리지 말 일이다. 이런 글씨체도 디자이너의 손끝을 거치면 의미 있는 디자인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 ‘홍단’의 반윤정 아트디렉터는 한 회사 직원의 동생이 보관하고 있던 받아쓰기 공책에서 영감을 받은 폰트를 개발했다. 그는 이 글씨체에다 광주광역시 양림동 대성구판장 입간판에서 발견한 서체의 특징을 접목했다. 대성구판장의 글씨는 초성과 종성을 일렬로 배열한 것이 독특하다. 이런 글씨가 초성-중성-종성의 균형을 지키기 힘든 아이들의 글씨와 유사한 데 착안해 둘을 결합한 ‘구판장체’라는 글씨가 나왔다.

 초등학교 아이의 글씨처럼 의식하지 않고 잘 모르는 상태에서 디자인한 것이 더 큰 미적 효과를 주는 현상을 전문용어로는 버나큘러 디자인(Vernacular design·비전문가의 디자인)이라고 부른다. 버나큘러는 사투리·방언을 뜻하는 말로 매끈하게 다듬거나 틀에 얽매이지 않은 것을 뜻한다. 배달 앱인 ‘배달의 민족’의 글씨체도 이런 버나큘러 디자인이 주는 효과를 겨냥해 개발됐다. 이를 위해 회사는 당시 인턴이던 태주희 디자이너에게 서체 개발을 일임했다. 태 디자이너는 서체 디자인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모눈종이에 손으로 글씨를 써가며 지금의 서체를 만들었다. 그 결과 ‘ㅅ’의 경우 양쪽의 두께와 기울기가 다르고, 초성으로 쓰일 경우와 종성으로 쓰일 경우 끝 모양이 달라지는 형태의 글씨체(한나체)가 나왔다. 기성 디자이너의 도움이나 수정도 배제됐다. 태 디자이너는 “기성 디자이너들이 관여하면 정갈하고 깔끔할 수는 있지만 비전문가의 어설픈 느낌과 무언가 삐뚤어진 데서 오는 독특한 감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별생각 없이 보던 광고 글씨에도 ‘완벽하고 정갈한 것보단 무언가 어설프고 어긋나 보이는 것이 시선을 붙잡는다’는 고도의 전략이 깔려 있는 셈이다.

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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