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정치 희화화한 개각 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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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사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의 갈등은 잠복해 있었던 문제다. 그동안 계기가 없었을 뿐이다. "100년을 가자"고 만들었던 열린우리당은 다음달 전당대회에서 창당 2년여 만에 일곱 번째 당의장을 선출해야 한다. 취임 65일 만에 사퇴한 정 전 의장까지 지도부의 임기는 평균 4개월에 불과했다.

이렇듯 단명 지도부가 계속된 것은 열린우리당이 시도한 새로운 정치실험에도 일부 원인이 있다. 그 실험에 서로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은 대통령이 당 총재를 맡지 않은 최초의 정당이다.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의 '수석당원'일 뿐이다. 청와대와 당의 관계는 분리되었고 당이 자율적으로 정치적 의제를 제기하며 독자적 영역을 구축해야 했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열린우리당은 대통령의 의지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하는 수동적 지원세력에 불과했다.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열린우리당은 '무늬만 여당'이었다. 당의 또 다른 실험인 상향식 공천의 확산, 인사권의 분산, 그리고 당의장과 원내대표의 투 톱 시스템 등도 리더십의 부재를 부채질했다. 누가 당 지도부가 되든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변화하는 정당의 내외 환경에 맞추어 새로운 리더십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누적돼 통제되지 않는 당.청 충돌의 에너지가 개각파동으로 표출된 것이다.

결국 노 대통령은 유시민 의원 입각이라는 자신의 원래 입장을 견지했다. 이로써 오늘 저녁 청와대 회동은 대통령의 인사에 대한 설명과 양해를 구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대통령제 정부 형태에서 장관은 해당 업무를 담당하여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국회의 청문절차를 받고 업무에 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인선이 이뤄지더라도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통령이 큰 틀의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해당 장관이 구체적 정책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국무회의 역시 '심의기구'로서 대통령의 의지를 확인할 뿐이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어떤 문제를 각의에서 논의했을 때 모두가 대통령의 의견에 반대했다. 하지만 링컨 대통령은 "반대 7 찬성 1로 본안은 가결됐다"라고 선언했다. 대통령제에서 장관 역할의 한계를 보여준다. 궁극적 책임은 대통령이 지는 것이다.

청와대가 당의 반발에 당황하면서도 불만을 가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왜 노 대통령은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인사를 강행했을까? 우선 권력누수 현상을 차단하기 위해 내각에 친정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의 인사들을 내각에 포진시켜 국정 장악력을 높이고 내각인사권을 바탕으로 당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까지 권력누수 현상을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유 의원에겐 차기 또는 차차기 대선구도에 나설 것에 대비한 경력관리용 배려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를 통해 국민은 다시 한번 정치적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당.청 모두 정치를 지나치게 희화화시키고 말았다. 나아가 당을 무시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게 됐다. 지명을 강행하더라도 협의 또는 의견 청취의 모양새를 갖추었다면 보다 나았을 것이다. 당.청 간 청와대 회동 하루 전에 벌어진 일이어서 모양도 사납다.

어쨌든 이번 사태로 여권의 앞날은 안개 속에 들어선 것 같다. 여권 분화의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여당에서 일부나마 청와대와 정부를 당에 정치적 부담을 주는 존재로 본다면 각자가 정치적 생존을 위해 독자적 행보를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방선거와 대선을 앞두고 여권의 내홍과 이에 따른 정치지형의 변화가 주목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