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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우리부부 작품 상급미술관서 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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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나는 위크데이에는 프라하 근교 브르노에 있는 타피스트리 공항에 나가서 온종일 산다. 나는 이곳에서 상오 7시부터 하오 5시까지 내 타피스트리 작품을 제작한다.
체코에서 아르트 프로티스라고 불리고 있는 타피스트리 예술은 독특한 기법으로 제작되는 체코만의 것이다. 체코 정부는 이 아르트 프로티스 제작기법의 국제특허를 갖고 있다.
이 기법이 체코에서 개발된 것은 19수년전 일로 체코의 국제특허시효가 1, 2년 내 곧 끝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르트 프로티스는 오스트레일리아 산 울(모)로 만들어진다. 제작과정이 까다롭고 복잡해 어느 예술보다도 작가의 섬세함과 인내가 필요하다.
우선 작품의 바탕이 될 평평한 판을 울로 만들어야한다. 순모판 이라고나 할까. 이 작품바탕의 털들이 일어나거나 밀리지 않도록 자봉틀로 꿰맨다.
다음에 작가는 그리고자 하는 그림의 대강을 이 바탕 위에 백묵으로 그린다. 이 백묵그림을 따라 각종 색깔로 염색된 털들을 필요에 따라 옮겨놓는다. 물들인 털 솜의 뜯어 붙이기인 셈이다.

<큰 작품 1년도 걸려>
내가 만드는 작품은 주로 8평방m 또는 6평방m 크기의 대작들이다. 결혼식장 사무실·극장·미술관등 각종건물의 실내장식으로 쓰이는 일이 많아 수요 건물의 벽이나 기둥크기에 맞게 주문 제작하는 때도 있다.
큰 작품일수록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길게는 1년 정도가 걸리기도 한다. 나는 회화전공이지만 오래 전부터 새로운 표현예술 장르인 아르트 프로티스에 매력을 느껴 이 일에 몰두하고있다. 나는 체코인과 결혼, 체코사람이 됐으나 전시회를 가질 때마다 팸플릿에는 항상 이기순 이란 이름을 쓰고 한국출생이라는 사실을 꼭 밝히고 있다. 타피스트리 작품에도 언제나 내성인 「이」자를 그려 넣어 사인하고있다.
내가 타피스트리 작품으로 실내장식을 하는 건물의 실외장식은 남편인 「야로슬라브」가 맡는 일이 많다. 그도 회화, 특히 판화전공이지만 조각이나 모자이크, 도자기 부문에도 조예가 깊어 실외장식 의뢰를 받는 일이 흔하다.
나는 이처럼 그와 함께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서로 호흡이 맞아 작품도 잘된다. 부부공동작품이란 점에서도 더욱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 싶어진다.
나는 간혹 출판사의 의뢰로 삽화를 그리기도 한다. 내 작품의 소재는 동양적인 것, 특히 한국적인 것이 많다.
동양사상이나 동양의 신비는 서양사람들에게 상당히 어필하고있다. 언젠가 나는 박혁거세의 탄생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일도 있다. 한국의 설화나 전설은 모두 좋은 작품소재들이다.
「야로슬라브」도 중국에서 그림공부를 했던 만큼 동양적인 것, 중국적인 요소가 그의 작품세계에 널리 깔려있다.
그는 중국 매니어(광)라고 할만큼 중국을 좋아한다. 나의 모국인 한국도 그가 그만큼 사랑하고 좋아하길 나는 바라고있다.
체코에도 미술관이나 화랑이 많이 있다. 몇 개나 되는지는 지금 기억할 수 없으나 프라하에만도 상당수가 있다.
체코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진 개인미술관이나 화랑이 많았으나 지금은 모두 국영이다.
미술관이나 화랑은 특급과 상중·하급으로 나눠지는데 특급미술관에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야로슬라브」나 나는 특급미술관에 작품이 전시 될 만큼 세계적인 명성은 없었으나 체코에선 우리들의 작품이 상급미술관이나 화방에서 전시되고 있다.
현재 체코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없다. 국내에선 「안드렐라」 라는 작가가 유명하다.
그는 판화가로 내추럴리즘의 그림을 그린다. 그의 판화들은 인간의 고뇌, 비참함 등을 적나라하게 표현해 쇼킹한 맛이 있다.
체코화가들 가운데는 정부의 요청에 따라 작품을 제작하는 이도 많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예술감각에 따라 창작활동을 하고있다.

<주말은 함께 지내>
앞서도 말했듯이 「야로슬라브」와 나는 각자의 활동 때문에 주말이나 함께 지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나는 브르노의 타피스트리 공장에서 한 주일을 보내고 우리는 토요일부터 함께 지낸다.
그러다 보니 그를 위해 내가 바칠 수 있는 시간이 적게 마련이고 그래서 나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다행히 「야로슬라브」는 건강한 체질이다. 당뇨기가 약간 있지만60이 다된 지금도 아침마다 냉수마찰을 하는 등 스스로 건강관리에 힘써 여전히 청년 같다.
일찍부터 대독 레지스탕스로 활약했던 그는 당시의 혈기와 강건함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있다.
음식도 가리지 않아 내가 해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잘 든다.
나는 가끔 김치를 집에서 담근다. 배추가 없어 오이김치를 담그는데 「야로슬라브」뿐 아니라 아들 「파벨」이나 딸 「렌카」, 사위「비토르」도 잘먹는다. 내가 김치를 좋아하다 보니 가족들도 덩달아 좋아하는 것인지 김치가 정말 맛이 있어서인지 잘 모르겠다.「야로슬라브」는 담배와 술을 즐겼으나 약5년 전부터는 담배를 끊었다. 아무래도 나이 탓일 테다.

<한국포도주 맛좋아>
술은 과음은 하지 않지만 포도주는 여전히 마신다. 해마다 햇 포도주가 나올 때 우리는 모라비아로 간다. 모라비아에서는 약2천2백 종의 포도주가 한달 동안 선보인다.
그는 포도주 감식에 일가견이 있어 모라비아의 포도주축제때는 자신의 생일처럼 흥분하기 일쑤다. 그는 포도주의 냄새만 맡고도 어느 해에 나온 무슨 술인지를 알아맞힐 수 있다.
이번에 나와함께 한국에 와서도 그는 한국산 마주앙을 식사 때마다 마시고 있을 정도다. 그는 한국산포도주가 무척 좋은 포도주라고 말하고 있다. 포도주 감식전문가인 그의 말이니 믿어도 좋을듯하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음식은 없으나 해삼요리를 대하면 입이 벌어진다. 중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중국음식 맛을 익힌 그는 젓가락도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안다.
그와 함께 있는 주말이면 나는 간혹 중국음식을 만들어주곤 하는데 그는 내가 만든 음식이 중국요리가 아니라고 눈을 흘긴다.
그러면서도 그는 접시를 깨끗이 비운다. 서울에 와서도 「야로슬라브」는 한국음식에 무척 맛을 들이고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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