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3. 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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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기타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필자. 거친 록음악을 하게 된것은 아버지의 영향 덕분이라고 말했다.

미군정 시절 노점상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유성기 레코드판을 팔았다. 대개 1940년대 미국 정통 재즈였다. 만주에 살 때 갖고 있던 것만큼 좋은 축음기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중고 축음기를 장만했다. 그 시절엔 여유 있는 집은 축음기를 마련하는 게 유행이었다. 그러나 국민학교 시절 나는 음악을 그렇게 즐기지는 않았다. '가갸거겨' 배우느라 정신 없고, 운동장에서 뛰어노느라 바빴다. 눈 오는 날이면 언덕길에서 대나무판 두 개를 발에 묶어 스키를 탔다.

음악가가 될 거란 생각은 꿈에서도 한 적이 없었다. 아들을 남자답게 키우려 한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한량(閑良)이셨다. 약주를 즐기고 파이프 담배는 입에 달고 사셨다. 재떨이를 두드리며 파이프를 긁는 걸 보면 삶의 여유가 느껴졌다. 아버지는 강감찬 장군 등 기개 넘치는 위인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큰 사람이 되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글씨도 잘 쓰셨다. 돌이켜보면 천재성을 지닌 분 같았다. 그러나 너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떻게 공부했는지는 미처 여쭙지 못했다.

아버지는 일요일이나 비가 와서 이발관 문을 닫는 날엔 그물을 짰다. 끄트머리에 추가 달려 있는 좽이그물(투망)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녔다. 자동차도 없던 시절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간 뒤 내려서도 한참 걸어가야 낚시터가 나왔다. 다리는 아파 죽겠는데 내색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짜증과 고통이 섞여 표정은 저절로 일그러졌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모른 체하며 성큼성큼 앞만 보고 걸었다.

아버지는 그물을 물 위로 던졌다. 그물 끝이 둥그렇게 확 퍼지며 사뿐히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익숙한 솜씨로 그물을 걷었다.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물고기가 그물 속에서 펄떡펄떡 뛰었다. 주워담는 건 내 몫이었다. 고기잡이를 하면서 배운 건 인내심과 삶의 여유였다.

하루는 아버지를 따라 산에 갔다. 아버지는 나뭇가지를 주워 활을 만들고 수수밭의 수수깡으로 화살을 만들었다. 활시위가 팽팽하게 휘어졌다. 동시에 하늘로 올라간 화살은 자취를 감출 정도로 멀리 날아갔다. 입이 딱 벌어졌다. 어린 내게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분이었다.

그 시절 내게 구체적인 장래 희망은 없었다. 그저 '대범한 사람이 되겠다'는 꿈만 품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음악은 못 했을 게다. 아버지는 남자가 여성적인 직업을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셨다. 음악은 아무래도 여성적인 면이 있지 않은가. 내가 클래식이나 소프트 뮤직을 하지 않고 록을 하는 것도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내 음악은 연주.선율 모두 강렬하다. 늘 남성적이고 거친 음악을 추구했다. 어쩌다 음악인의 길에 들어서긴 했지만, 저세상에 계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덜 저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작은 일에 집착하지 말고 모든 걸 헤쳐나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삶의 방식을 수시로 가르치셨다. 난 그 힘으로 여태까지 인생을 살 수 있었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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