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orld에세이] 독일 메르켈 총리의 '노변정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지난해 12월 31일 오후 8시5분(현지시간). 독일 공영 텔레비전인 ARD 방송에 출연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평소와 매우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딱딱하고 강인해 보이는 '철(鐵)의 여성'의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대신 푸근하고 정감 있는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국정의 책임자인 총리로서 국민에게 새해 인사와 더불어 당부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9분간 독일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려 애썼다.

먼저 6월 독일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화제로 꺼냈다. 그는 "전 세계가 16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처럼 독일을 주시하게 될 것"이라며 독일 대표팀의 선전을 주문했다.

그는 "독일 대표팀이 우승할 전망이 결코 어둡지 않다"며 "독일 여성 축구대표팀은 이미 세계 챔피언이다. 남성팀도 같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정 현안에 대해선 국민의 협조를 구했다. 그는 "실업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은 이제까지 해 왔던 것보다 더 일을 많이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그는 "독일은 아이디어가 많은 나라다. 그러나 아이디어를 가지고 생존하는 것은 그 아이디어를 실제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가능하다"며 "내일 아침 일찍부터 시작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국민에게 확실한 비전을 제시했다. 메르켈 총리는 "대연정 정부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고, 그것은 10년 후 독일이 다시 유럽에서 가장 앞선 국가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29일에도 국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광고를 전국의 일간지와 잡지에 실었다. '함께하면 더욱 강해진다'는 제목의 이 글에서 개혁에 동참해 줄 것을 독일 국민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매년 독일 대통령과 총리는 각각 성탄절과 12월 31일 대(對)국민 연설을 한다. 연설에 특별한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다. 그저 한 해를 보내는 소회와 국정의 어려움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또 서민들의 살림살이를 걱정하며 다독인다.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호소도 한다.

국민을 놀라게 할 만한 뉴스거리가 담겨 있는 것도 아니지만 대국민 연설의 시청률은 언제나 상당히 높다. 비결이 무엇일까. 난롯가에 앉아 정담을 나누듯 편안하게 나라의 현안을 설득력 있게 들려 주기 때문이 아닐까. '노변정담'으로 유명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베를린 = 유권하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