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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일과 중요한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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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차이는 둘째 우선순위에서 나온다. 급해 보이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하느냐, 중요하긴 하지만 그리 급박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하느냐로 갈린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론 후자가 우선해야겠지만 실제로는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가 많다. 하루가 다르게 휙휙 바뀌는 사회에서 살다 보니 그렇게 되는 걸까. 스스로 따져보자. 시간이 없다, 당장 급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정작 중요한 일을 미뤄두진 않았는지. 잡일에 치여 건강관리.재충전.노후대책에 소홀하진 않았는지. 10년, 20년 단위의 인생 로드맵을 그리기보다 눈앞의 이익에 매달리진 않았는지. 1년 내내 분주하게 뛰어다니긴 했지만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면 일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지 않았는지 의심해 볼 만하다.

이는 개인 차원의 현상만이 아니다. 정부 정책도 비슷하다. 최근의 사례가 사학법 개정이 아닌가 싶다. 사학 비리 근절은 물론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교육계에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얼마나 많은가. 학부모의 허리를 휘게 하는 사교육, 어린 학생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과도한 수험 경쟁, 학벌과 학력을 우대하는 풍조…. 그러려니 하고 모두 익숙해졌기 때문에 화급해 보이지 않을 뿐이지 꼭 풀어야 할 과제 아닌가. 그런데도 교육당국이 사학법 개정에 힘을 쏟은 걸 보면 정책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잡고나 있는지 의문이 든다.

큰일이 벌어졌을 때도 그렇다. 일단 급한 불을 끈 다음의 수습 과정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면 부질없는 데 힘을 빼기 쉽다.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 파동도 잘못하면 그리 될 수 있다. 가장 급하고 중요한 진실규명은 서울대가 마무리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문책과 수사와 처벌이 이뤄질 듯하다. 하지만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지금 당장은 실망과 배신감이 커 책임추궁이 급해 보이겠지만 중요한 일은 따로 있다. 바로 유사 사태의 재발을 막는 것이다. 그러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연구과정과 지원절차 등을 샅샅이 훑어 황 교수가 실패하게 된 메커니즘을 규명해야 한다. 누구를 문책하는 것보다 이번 파동이 과학발전에 쓴 약이 되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 집단이익이 우선순위에 혼란을 주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느 통합은행에서 은행 이름을 두고 통합되는 쪽의 노조가 시비를 걸고 나선 게 전형적 사례다. 이름을 어찌 부르든 통합은행에 장기적으로 중요한 숙제는 경영효율을 높이고, 고객에게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이름을 명분 삼아 투쟁 운운하는 건 일의 우선순위가 한참 뒤집힌 꼴이다.

그뿐인가. 더 걱정되는 건 새해다. 선거를 의식한 정부.여당은 중요한 정책보다 급한 정책을 우선시할 공산이 크다. 어렵고 골치 아픈 일들은 뒤로 미루는 대신 생색 내기 좋고 빛나는 일부터 먼저 하려 할 것이다. 그러다 정작 해야 할 일들은 자꾸 뒤로 넘기게 된다. 경험상 대개 그랬다.

이렇게 곳곳에서 '이월부채'가 쌓이면 어떻게 될까. 주요 과제들은 계속 미해결로 남고, 같은 실패가 되풀이되고, 그러느라 사회적 에너지는 자꾸 소모될 것이다. 그렇다면 새해 벽두엔 일의 우선순위를 따져보는 일부터 우선적으로 해보자.

남윤호 미디어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