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테러 막는다며 인권 유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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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세계적인 인권감시 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AI)가 지난 28일 연례보고서와 함께 내놓은 짤막한 영상자료는 쿠바에 있는 미군 기지 관타나모를 보여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잡혀온 포로 6백여명이 구금돼 있는 기지를 비춰주면서 "미국이 명백하게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국제법에 따를 경우 이들이 만약 전쟁포로라면 종전과 함께 석방됐어야 하고, 만약 전쟁포로가 아니라면 혐의에 따라 정식 기소돼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 국제법상 필요한 어떤 절차도 밟지 않고 이들을 1년 넘게 구속하고 있는 것은 '테러와의 전쟁'이란 미명 아래 자행하는 명백한 인권유린이라는 주장이다.

다음 장면은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여인. 미국이 전후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상황에서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각종 약탈과 살육이 이어지고 있다는 고발이다.

역시 테러와의 전쟁이 낳은 결과다. 국제사면위는 이라크 전후처리가 아프가니스탄처럼 되면 더 큰 혼란과 인권침해가 예상된다고 경고한다.

아이렌 칸 국제사면위 사무총장의 기자회견 역시 반미로 이어진다. 칸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냉전 시대 서방세계가 그토록 혐오했던 고문과 불법억류가 오늘날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안전과 평화를 위한 반테러 전쟁이 국제법과 관행을 무시함으로써 세계 인권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칸은 이어 "냉전의 동서 진영이 사라진 오늘 세계는 유일 최강국 미국과 기타 나머지 국가로 나눠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안전, 미국민 보호를 위해 나머지 국가 국민의 인권은 무시당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국제법을 무시하면서 전세계적으로 '반테러' 구호가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체첸의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인도가 새로운 테러방지법을 제정하면서 경찰에 구금된 상태에서의 진술을 증거로 인정키로 한 것이 그 예다.

보고서의 결론은 인권에 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정부나 국가라고 해서 무력을 마음대로 쓸 수는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지키려면 더욱더 법과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을 경우 최근 테러와의 전쟁이 낳은 결과처럼 민족과 국가, 인종과 이웃 간에 불신과 갈등이 더 고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비난을 일축했다.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연합군의 노력으로 수백만명이 자유를 얻은 데 대해 세계가 기뻐하고 있다"면서 국제사면위는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자행된 인권침해를 밝히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쏘아붙였다.

영국의 언론들은 29일 아침자에 일제히 국제사면위 보고서를 대서특필 했다.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테러와의 전쟁에 앞장서 온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언론들은 "국제사면위의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미국 측의 반론을 거의 반영하지 않았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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