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려만 다니는 국제계약은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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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 우리나라 회사와 미국 회사간의 국제계약을 둘러싸고 석연치 않은 문제들이 자주 보도되는 것을 볼 때 법률가의 한사람으로서 느끼는 점이 많이있다. 특히 이번에 문제된 한전과 미 벡텔사간의 계약은「불평등계약」운운하고있고 더구나 관련된 액수도 천만달러 단위를 넘어서는 엄청난 금액임을 볼 때 더욱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게된다.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우리나라 산업도 고도로 국제화 되어가고 있고 국제거래의 증가와 함께 각종 국제계약도 점차 다양화·거액화 돼 가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 원인이야 어찌되었건 앞으로는 이와같은 사태가 재발되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싶다.
물론 신문지상에 단편적으로 보도된 것만 가지고는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으나 이러한 문제가 우리측의 계약에 임하는 자세에 어떤 문제점이 있어 유발된 것이라고 한다면 더없이 불행한 사태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원래 계약이라고 하는것은 사회제도가 과거 봉건사회의 명령·복종이라는 신분관계로부터 근대산업사회로 발달하게 됨에 따라 사인간의 법률관계는 당사자 스스로의 약정에 의해 지켜나가야 한다는 소위「계약자유의 원칙」아래에서 발달되어온 개념으로서 이제는 사회생활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당사자간의 권리의무를 규제하는 매우 중요한 사적자치의 수단이 되고있는 법률제도인 것이다.
각종 국제거래도 모두 계약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일단 당사자간의 합의에 의해 계약이 체결된 이상 그 계약의 각 조항은 서로 반드시 지켜야하며 그로 인한 모든 이·부리도 당사자 스스로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원칙이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계약의 자유도 양당사자가 서로 대등한 지위에 있지 못할 때에는 그 진가가 발휘 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상대가 총을 가지고 덤비는데 맨주먹으로 대항할 수 없는 것처럼 계약을 체결함에 있어서도 서로 상대에게 뒤지지 않도록 그 준비와 관련된 법률관계의 연구에 만전을 기할때에 비로소 대등한 지위에서 공평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것이고 불공평 또는 불평등계약으로 인한 뜻하지 않은 불이익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계약관계는 곧 법률관계이므로 법률전문가인 변호사의 도움이 요구되는 것도 바로 이와같은 이유에서인 것이다.
특히 외국기업과의 국제계약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의 법뿐 아니라 상대나라의 법도 알아야하고 관계되는 국제관례도 살펴봐야 하는 등 법률관계가 매우 복잡하기 마련이므로 자칫 소홀히 생각하였다가는 뜻하지 않은 불이익을 자초하게 될 위험이 더욱 높은 것이다.
조그마한 점포임대차계약도 변호사의 도움없이는 체결하지 못하는 줄 아는 식의 생활방식이 뿌리깊게 박혀있는 구미 각국에서는 왠만한 기업이라면 회사내부 자체에 변호사들로 구성된 법률부서를 가지고 있으면서 각종 법률문제를 처리하게 할뿐 아니라 복잡하고 전문적인 계약관계는 외부의 전문적 법률회사의 자문까지 거쳐 처리하는 등 계약체결에 만전을 기하고 있음을 볼때 과연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이와같은 외국기업들과 대등한 지위에서 공평한 계약을 체결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국제계약도 각 방면에 걸쳐 다양화되어가고 있으므로 계약을 체결함에 있어서도 그 분야의 전문변호사가 필요한 때가 온 것이다.
이와동시에 국제거래 관계를 취급하는 변호사들도 분야별로 전문화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한사람의 의사가 모든 분야의 전문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한사람의 변호사가 모든 국제거래의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최근에 문제된 계약이 과연 불평등계약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우리쪽에서 공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에게 돈을 주면서 공사를 시킨 것이므로 불평등계약 이라는 말 자체가 어울리지도 않는 상황인 것 같다. 물론 계약에도 사정변경의 원칙이 있으므로 사후의 변경된 사정에 따른 계약의 수정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반면에 당초 예견이 가능한 사정의 변경은 당사자가 스스로 변경의 위험을 부담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원칙도 있는 것이다. 문제된 계약이 어느쪽에 해당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상에 보도된 것처럼 만일 이미 불평등한 계약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더 이상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번 기회에 왜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되였는지 신중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푼의 외화라도 더 벌기 위해 땀흘려 노력하고있는 우리의 수출역군들을 생각할 때 막대한 외화의 지출이 단순한 계약상의 잘못으로 인한 부당한 결과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국제거래에 있어서 종래의 끌려만 다니는 식의 사고에서 탈피하여 우리 스스로 이니시어티브를 쥐고 주도함으로써 우리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보호하여 한푼의 외화라도 무의미하게 소비하지 않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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