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9) 제80화 한일회담-요정외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내가 주일대사에 부임해 한일회담 재개를 위한 정지작업에 동분서주하던 때 일본정계에는 예상외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이께다」수상은 자민당총재로 3선한지 불과 2개월여 만인 9월9일 후두부유두종(사망후 암으로 발표)으로 동경국립암센터에 입원, 장기요양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고 10월25일 공직사퇴를 선언했다.
때문에 일본정국은 좀 어수선했다. 그 여파로 11월 중순께 재개키로「시이나」외상과 원칙적 합의를 봤던 한일회담도 약간 늦추어지게 됐다.
정권교체라고 했지만 자민당내의 어느 1인이「이께다」씨를 이어 집권하는 자전형태였다. 내가보기에 후계자는「사또」(좌등영작)씨가 분명했는데도 자민당 수뇌들은 그 옹립의 형식을 마치 즐기기라도 하는듯 공개적 또는 막후절충을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천도부총재와 삼목무부간사장(후에 수상 역임)이 조정역이 되어 당내 실력자의 의향을 분주히 타진, 마침내「이께다」수상의 추천이라는 형태로 그의 정적이었먼「사또」씨가 후계자로 선택되는 과정이 국외자가 보기에는 다소 묘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사또」씨는 11월9일 수상직에 선출되어 조각에 착수했으나 관방장관(교본등미삼랑)과 법제국장관(고십정기)만을 교체했을 뿐 여타 각료들을 모두 유임시켰다.
나는 이같은 정세변화의 관찰결과 한일회담이 오히려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될 것으로 확신하고 우선 박대통령에게 이같은 보고를 하고 11월 중순 l차 귀국하겠다고 알렸다.
「사또」수상이라면 꼭1년전인 이맘때 내가 동경에서「야쓰기」씨의 주선으로 만나 한일 현안 전방에 걸쳐 허심탄회하게 상호 의견을 교환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주재국 대사의 입장으로서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 셈이었다.
게다가 그는 나와 가까운「야쓰기」씨와 가깝고 또「야쓰기」씨를 통해 지우를 얻은「기시」전수상의 실제이니 만큼 더욱 마음 든든했다.
이즈음 나는「야쓰기」씨의 영향권에 있던 자민당 실력자들을 상대로한 일본식 요정외교를 통해 그들과의 상견례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기시」전 수상, 「후꾸다」전 장상(복전·후에 수상 역임), 「이시이」전 부수상(석정광차랑), 「다나까」중의원의원(전중달부), 「후나다」중의원의원(선전중·후에중의원의장 역임), 「하시모또」중의원의원(교본등미삼랑) 등 일본정계의 유력 인사들이었다.
한일회담을 성사시키자면 특히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시키거나 적어도 행정부의 대 한정책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이들 유력 정치인들과의, 긴밀한 유대확보가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활동비를 쪼개가며 요정외교에 많은 정력을 소모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특별히 인상이 선명한 이는「다나까」의원이었다.
1920년대 육군대신을 지내고 총리대신 재임중 만주군벌 장작림 폭사사건에 인책해 물러났던 전중의일씨의 아들인 그는 동해와 인정해 어민이 많은 야마구찌(산구)현 출신이었다.
그는 내가 주일대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어디 부임하기만 해봐라. 내가 한번 혼을 내주겠다고 마음먹었다』면서 자신이 야마구찌현 지사시절 평화선침범 혐의로 자기현의 많은 어민들이 한국함정에 나포되어 지사로서 곤욕을 치른데 대해 일종의 보복을 하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그의 지사시절 내가 외무부 정무국장이었다는 것을 기화로 나에게 분풀이를 하겠다고 했으나 막상 나와 만나 얘기를 해보고『그만 물거품이 됐다』며 호탕하게 웃던 기억이 새롭다. 이들 유력인사들은 때로는 나를 골탕먹이기도 했지만 대체로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많은 힘을 보태주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