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9)전관수역 협상-제80화 한일회담(21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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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평화선 문제를 정치적으로 타결짓기 위한 한일 정상회담은 64년3월10일 도오꾜의 일본 농림성 회의실에서 열렸다.
평화선이 그어진뒤 13년동안 총1천3백해리에 걸쳐 완강하게 효력을 지속해온 이 「해양주권선」은 결국 한일국교 정상화라는 시대적 소명에 떨려 운명이 다하려 하고 있었다. 10년간에 걸친 「철폐하라」 「못한다」의 첨예한 대립은 어느새 「철폐는 기정사실」로 한걸음 뒤로 물려지고 대신 △전관수역을 몇해리로 할것인가 △기선을 어떻게 그을 것인가 △어업협력차관은 어떤 규모가 될 것인가 등 현실적인 문제가 회담의 테이블에 올라있었다.
회담은 사흘째되는 날부터 우리의 원용석농림장관과 「아까끼」(적성) 일본상의 단독요담으로 진행되었다. 4월6일까지 근 한달동안에 걸쳐 모두 12차에 걸쳐 강행된 원-「아까끼」회담의 초점은 역시 앞서 말한 전관수역과 어업협력자금규모에 맞춰졌다. 회담은 우선 기선문제에서부터 벽에 부딪쳤다.
일본측은 한국본토와 제주도가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는 이유로 본토와 제주도 사이에 기선을 긋자고 주장하고 나왔다. 우리측은 이에 『제주도와 본토를 분리하자는 주장은 어부성설』이라고 반박했다. 본시 제주도를 본토와 분리하자는 일본측 주장은 제주도 근해의 황금어장을 전관수역이나 공동수역에서 제외시켜 일본측 조업이 가능케 하려는 의도였으니 우리로서는 이를 용납할리 만무였다.
실제로 영해에 관한 국제규약은 제4조에 『기선은 연안의 일반 방향에서 현저하게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고 일본측 주장을 뒷받침하는 면이 있는 반면 또 4조의 끝항에는 『특수한 경제적 이익 때문에 그 사실과 중요성이 관행에 의해 명백할때는 직선의 기선결정에 이를 고려 할 수 있다』고 우리측 입장의 정당성을 거꾸로 뒷받침하고 있어 이문제는 양쪽의 입장이 모두 근거를 갖고있는 셈이였다.
쌍방은 그후 6차레에 걸친 단독회담에서도 종시 이 기선문제에 대한 결말을 내지못했다. 그러나 각 수역에서의 출어척수 제한문제 △어업협력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진전이 있었다.출어척수문제에 대해 일본측은 A지구(황해수역)의 시망70통과 고등어일본조 90척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기선저인망 출어척삭 2백85척은 다소 줄이겠다고 나왔고 한국이 요구한 1억1천4백만달러의 어업협력자금도 대장성과 협의하겠다고 긍정적 자세를 나타냈다.
이밖에 공동위원회설치·어로단속·재판관할권동 기술적 문제는 실무회담에서 계속 토의해 나가기로 했다. 전체적으로 가장 핵심인 제주도의 기선포함 및 어업협력문제가 보다 고차적인 정치 절충사안으로 남겨진 외에 평화선 문제는 원-「아까끼」농상회담으로 사실상 타결의 길목으로 들어섰다.
일본측에서 보면 앓던 이를 반쯤 뽑은 셈이라고나 할까.
이때 김종비씨는 이미 정계에 복귀해 공화당의장자리에 있었다. 김씨를 중심으로한 공화당은 한일농상 회담개최 본회담재개등으로 마지막 고비에 다다른 한일국교정상화회담에 힘을 쏟고있었다.
농상회담을 측면지원하고 본회담 재개를 위해 김의장이 다시 일본을 방문하게 되는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때는 한일회담 반대의 여론도 그 어느때보다 파고가 높아가고 있었다.
야당인 민정당·삼민회 등이 중심이돼 「대일저자세 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읜가 결성돼 조직적이고 범국민적인 저지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일회담을 둘러싼 거센 국론의 분열현상이 본격적으로 조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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