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아쉬움 남는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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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973년 체결된 한·미 원자력협정이 42년 만에 개정됐다. 새 협정으로 한국은 원자력 연구와 수출에서 적지 않은 실리를 챙겼다. 미국의 동의하에 저농축 우라늄을 개발할 길이 열렸고, 까다로웠던 수출입 인허가도 간소화돼 원전 수출의 걸림돌이 해소됐다. 연구개발 차원이긴 하지만 파이로프로세싱(건식재처리)의 전 단계인 전해환원 권한을 확보한 것도 긍정적이다.

 하지만 핵심 쟁점인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에선 체면치레 이상의 진전을 얻어 내지 못했다. 새 협정에서 이른바 ‘골드 스탠더드’ 조항은 빠졌지만 한국의 농축·재처리는 미국과 고위급 협정을 통해 합의해야만 가능하다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원자력 이용 규모가 세계 5위인 한국이 여전히 독자적인 농축과 재처리 권한을 확보하지 못한 점에서 새 협정은 한계가 분명하다. ‘새 협정은 선진적이고 호혜적’이란 정부의 자랑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사용후 핵연료는 버리면 폐기물이고, 재처리하면 연료다. 재처리 길만 터주면 핵연료를 얻을 수 있는데도 우라늄을 사서 쓰는 건 불합리하다. 현재 세계 농축 우라늄 시장은 공급 초과이지만 시장 상황이 급변해 우리가 우라늄 부족에 시달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게다가 현재 국내 원전에는 폐연료봉 1500만 개가 쌓였고, 매년 700t이 추가 발생하고 있다. 고리원전의 폐연료봉은 연말에 포화상태가 된다. 미국이 핵폐기물 관리기술을 이전해 주기로 했다지만 코앞에 닥친 핵폐기물 대란 우려를 해소하기엔 턱도 없는 수준이다.

 미국의 핵 비확산 정책기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 정부가 처음부터 이를 의식해 너무 소극적으로 협상에 임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미국은 88년 전범국가 일본에 농축과 재처리를 모두 허용했고,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을 거부하고 핵무장을 강행한 인도에도 포괄적으로 허용했다. 그런 만큼 정부는 미국의 이런 이중잣대를 집요하게 지적하고 ‘한국이 핵무장을 할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우려를 불식시켰어야 했다.

 한국은 73년 원자력협정 체결 당시 원전은커녕 초보적 기술도 없었다. 지금은 23기의 원전으로 전력의 3분의 1을 충당한다. 원전 7기를 건설 중이며 중동에 수출까지 하는 원자력 강국이다. 또한 91년 남북 비핵화선언 이후 북한의 세 차례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비핵화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원칙을 지켜왔다. 따라서 미국이 핵 이용 모범국이자 동맹국인 한국에 농축·재처리 포괄 금지방침을 고수한 건 이해하기 힘든 처사다.

 다행히 새 협정은 한·미 간에 고위급 협의체를 신설해 원자력과 관련된 모든 사안을 다루기로 했다. 그동안 농축과 재처리에 대해 발언 기회조차 봉쇄돼 온 우리가 미국에 할 말을 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된 것이다. 그런 만큼 새 협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정부는 미국을 지속적으로 설득해 농축·재처리를 포함한 우리의 ‘핵 국익’ 확보를 게을리해선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