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아프지만 올 것이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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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의원들께 부탁드린다. 대통령이 오시고 해결될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20일 심야에 이완구 국무총리가 사의를 표명하기 전 신상진 성남 중원 국회의원 후보 지원 유세를 마친 뒤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새정치연합이 이완구 총리의 해임 건의안 제출을 강행할 뜻을 비친 데 대해서다. 그는 “대통령께서 국익을 위해 순방외교를 하는 와중에 굳이 해임 건의안을 내겠다는 건 정치 도의상 무리”라고도 했다.

 김 대표는 지난 16일 박근혜 대통령과 독대한 뒤 “대통령이 ‘순방을 다녀와서 결정하겠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만 조용히 기다려 달라”며 이 총리의 즉각 사퇴를 원하는 당 소속 의원들을 설득해 왔다. 하지만 이 총리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관계에 대한 추가 폭로가 이어지고 새정치연합은 문 대표가 직접 나서 해임안 제출 카드로 압박해 오자 내심 고민이 깊었다. 일단 야당의 해임 건의안 제출에 대해선 “의총을 열어 결정하겠지만 무리한 표결에 응할 이유는 없다”는 쪽으로 지도부 의견을 모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총리가 결국 사의를 표명하자 김 대표의 측근들은 “마음이 아프지만 올 것이 왔다”는 입장을 보였다.

 김 대표의 한 측근은 “김 대표가 박 대통령과 독대할 당시 이 총리가 직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란 점을 대통령께 분명히 전했고 대통령도 그런 인식을 함께했다”며 “그러나 김 대표는 ‘이 총리도 명예가 중요한 사람인데 억울하게 쫓기듯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김 대표 역시 이 총리의 자진사퇴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었다. 그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이 문제는 (대통령이 귀국하는) 며칠 뒤면 해결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해결’의 의미에 대해 김 대표는 “박 대통령의 (해임) 결단과 이 총리의 자진사퇴 모두를 포함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한 핵심 당직자는 “김 대표는 박 대통령 귀국 전 이 총리 사퇴를 종용하는 일도 없겠지만 이 총리가 사의를 표명한다면 만류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이 총리가 자진사퇴하자 김 대표 측은 “이 총리의 결단을 높이 평가한다. 이 총리가 적절한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사실 ‘성완종 리스트’의 직격탄을 맞은 이 총리는 최근 사면초가에 놓인 상태였다. 박 대통령은 지난 16일 중남미 순방을 떠나기 직전 이 총리가 아닌 김 대표를 불러 독대했다. 대통령이 없으면 총리가 내각을 통할하는 게 순리지만 박 대통령은 이 총리를 찾지 않았다. 검찰의 태도도 싸늘했다. 김진태 검찰총장이 이 총리의 ‘부패와의 전면전’을 선포하는 대국민 담화를 보고 “어떻게 저런 얘기를 할 수 있느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

 급기야 이날 오전 당내 소장파 모임인 ‘아침소리’ 하태경 의원은 “박 대통령 귀국 전 사표를 내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주라”며 이 총리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김 대표의 핵심 측근은 “이 총리가 홀가분한 상태에서 결백을 입증받아야 나중에 다시 지역 정치인으로서도 다시 살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가영·허진 기자 ide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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