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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삶 느린 생각] 정신문화가 부실하면 물질적 토대는 오래 못 가는 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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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호 28면

일러스트 강일구

하도 사건이 많은 세상이라 큰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기억이나 마음에 오래 남아 있지를 않고, 또 그것을 검토해 볼 여유를 주지도 않는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 된 듯하지만 근래의 큰 사건 중 하나는 루프트한자의 자회사 저먼윙스의 항공기 추락사건이었다. 항공여행이 많아지니 항공기 사고가 많아지는 것도 불가피한 일일 수 있다. 그런데 저먼윙스 에어버스 320의 추락은 모든 증거로 보아 사고가 아니라 계획된 사건이었다고 한다. 조종사가 자폭을 계획하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자살을 한다 하여도 무고한 149명의 목숨을 동반 살해한 것은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것은 요즘의 어느 자폭 테러 사건에 비해서도 가공할 테러 행위였다. 세월호 사건과 마찬가지로 관리체제가 참으로 책임 있게 움직였는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관심은 그러한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된 동기에 쏠린다고 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조금 생각해보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16> 물질세계와 정신의 자리

병적인 파괴본능이 잔학한 행위로 표출
추락한 항공기의 부조종사 안드레아스 루비츠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고 의사 진단도 여러 차례 받았는데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고 한다. 우울증은 유전적인 것일 수도 있고 우연히 발병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루비츠의 경우 그것은 그의 좌절감에 관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종사로서의 성공의 길을 순탄하게 밟아서, 결국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조종사가 되는 것이 루비츠의 희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순조롭지가 않았다. 우울증이 승진을 막았다고 할 수도 있고 승진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우울증이 생겼거나 심화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의 속마음에 대한 실마리의 하나는 독일 일간 빌트에 보도된 마리아라는 여자 친구의 말이다. 마리아는 이 사건을 전해 듣자 곧 그가 하였던 말이 되풀이하여 생각났다고 한다.

“체제를 바꾸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 그런 다음이면 모든 사람이 내 이름을 알게 되고 기억하게 될 것이다.”

소속하고 있는 서열화된 세계 속에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은 젊은이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야망이나 소망이다. 마리아가 전하는 말에서 알기 어려운 것은 바꾸겠다는 체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이것을 사회 체제 탓으로 돌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체제는 보다 좁혀 자기와 관련된 어떤 큰 테두리를 말한 것인지 모른다. 큰 테두리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얻게 될 자신의 명성에 대하여 말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자살과 살인을 합쳐서 저지르는 것 그리고 어떤 짓을 해서라도 명성, 또는 악명이라도 얻고자하는 것은 종종 파라노이아(편집증) 환자들에서 볼 수 있는 증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은 정신병자만 갖는 소망이 아니다. 루비츠는 27세였다. 삼십이립(三十而立). 삼십에 선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삼십이 되기까지는 사람들이 자기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수업 그리고 방랑의 시대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정체성을 얻는 방법의 하나가 나쁜 일로든 좋은 일로든 널리 인정을 받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알튀세르의 유명한 생각의 하나에 ‘국가 이데올로기 기구가 내놓는 이데올로기의 부름에 답함으로써 개인은 비로소 주체가 된다’는 것이 있다. 이것을 설명하는 데에 알튀세르가 드는 간단하고 재미있는 예는, 길에서 경찰이 나를 부르게 되는 경우이다. 그 때 사람들은 “나를 부르는 거예요?”하면서 그 호명에 응하여 자기를 확인한다. 비슷하게 사람들은 큰 타자(他者)의 부름에 응하여 자기가 된다. 이데올로기는 큰 타자의 하나이다. 신·자연·역사·민족·국가·당·과학과 같은 이념이 그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이념에 자기를 바치는 것이 바로 주체적 인간이 되는 방법이다. 주체적인 존재란 스스로 마음을 움직이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보다 큰 주체, 즉 타자에 복종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세상이라는 타자의 확인을 요구한다.

자아의 정체성은 정신적 각성에서 생겨
파라노이아에게 폭력행위는 세상의 인정을 받는 간단한 방법의 하나이다. 그것이 사람을 널리 묶어주는 이념을 위한 것이면, 명망 또는 악명은 더욱 큰 것이 된다. 종교는 나를 부를 수 있는 타자 가운데도 가장 큰 타자일 수 있다. 그것은 세계 전체를 포괄하고 또 적어도 교리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면서 승복을 요구한다. 물론 파라노이아 환자에게는 그 관계가 세상의 눈에 전시되어야 한다. 쉼 없이 보도되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테러행위는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반드시 집단의 뒷받침이 없다고 하여도 큰 타자의 명분으로 행해지는 폭력 행위는 정체성을 크게 확인하는 일이 된다. 2년 전에 있었던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폭탄을 던져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던 조카르 사르나에프에 대한 판결이 수일 전 내려졌다.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기로 한 것은 이슬람 국가들에 대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을 벌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그는 말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에 무슬림 다수 거주지역인 러시아의 체첸서 이민해온 20세의 청년이다. 이러한 예들은 인간의 마음에 숨어 있는 병적인 파괴본능이 얼마나 잔학한 행위 속에 드러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생각하여야 할 것은, 위에 비친 대로, 세상의 큰 테두리나 대원리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얻고자 하는 것은 인간 본능의 요구라는 사실이다. 특히 젊은이의 경우에 그렇다. (알튀세르 식으로 생각하면, 이데올로기의 조작에 의하여 그 본능은 결국 망상에 이를 뿐이라고 하겠지만.) 전에는 많은 문화가 이 본능적 요구에 대하여 정해진 답을 가지고 있었다. 지학(志學), 학문을 뜻하고 교양을 통하여 자기형성을 도모하고 하는 것은 모두 이에 관련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쉽지 않은 일임은 옛날에 학문 수행을 곤학(困學)이란 말로 표현한 데에도 들어 있다.

자기 발견의 필요가 얼마나 원초적인가 하는 것은 원시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통과의례’에서 볼 수 있다. 아메리카 토착인들 사이에 있어 왔던 통과의례는 흔히 ‘비전 퀘스트’라고 말하여지는 구도 고행(求道苦行) 시험을 포함한다. 며칠을 밥을 굶고, 잠을 자지 않고, 황야를 헤매는 고행의 길이다. 방황은 어떤 동물의 환영이 환한 빛 속에 떠오를 때까지 계속된다. 그 때 젊은이는 자신의 정신적 근본을 깨닫는다. 그렇게 얻게 되는 깨우침을 거쳐서 젊은이는 공식적으로 성년이 된다.

어떤 부족의 비전 퀘스트는 새로운 이름을 받는 데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름은 신령스러운 존재가 나타나 주는 것일 수도 있고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이름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알리지 않고 일생을 혼자 지녀야 한다. 이것은 정체성의 추구에 중요한 해석을 가할 수 있게 한다. 자아의 진정한 정체성은 스스로의 정신적 각성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비밀한 이름의 뜻이라 할 수 있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생각에는 자신의 존재가 초월적인 차원에서 받은 ‘선물’이란 것을 알게 되는 데에서 진정한 자기가 비롯된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는 이러한 요구와 필요가 마음 깊은 곳에 들어있다는 인식이 사라지고 젊은이들의 방황이 정처가 없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세계는 외면적인 야망은 인정하되 인간의 정신적 존재로서의 자기 정립의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물질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 불가피한 일로 생각되지만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자체의 안정성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경제의 토대가 삶의 기본 바탕이 되고 문화는 그 위에 세워지는 허상일 뿐이라는 것은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주장의 하나이다. 물론 이 주장을 수정하여 사회적 삶의 두 부분의 관계가 반드시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의견은 마르크스주의 내외에 존재한다. 오래전에 출간된 미국 정치학자 에드워드 C 밴필드 저서에 『후진 사회의 도덕적 기초』라는 것이 있다. 1950년대 이탈리아 남부에서 행한 현지 조사에 기초한 이 책은, 제목에 나와 있는 대로이탈리아 남부의 빈곤은 도덕적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 데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가족 중심의 이기주의 또는, 그의 표현으로는, ‘가족무도덕주의’일 뿐이고 사회적 공동체 의식이나 그것에 기초한 도덕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물질적 토대가 없이는 문화 그리고 정신의 문화가 존재하기 어렵다고 하겠지만 정신문화가 존재하지 않고는 토대도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깊은 정신은 국가·사회 기율 너머에 존재
오늘의 세계에서 독일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선진적이고 안정된 나라의 하나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한 요인은 정치적 윤리적 기율일 것이다. 니더작센주 지사 시절에 이해관계가 겹치는 사업가로부터 휴가 비용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로 전임 대통령이 사임하게 된 곳이 독일이다. 그러나 독일도 오늘날 깊은 의미에서의 정신을 존중하는 국가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참으로 깊은 정신은 국가나 사회의 기율을 넘어가는 곳에 있지 않나 한다. (이것은 전체주의 국가의 완전한 기율과 질서에 깊은 의미의 인간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없는 데에서도 미루어 볼 수 있다.) 안드레아스 루비츠 사건이 보여주는 것도 그가 살고 있는 곳이 사회 기율은 있어도 젊은이를 깊은 내면적 자각으로 인도해줄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 이슬람이 갖는 호소력은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일단은 종교가 갖는 정신적 호소력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광신적 종교가 되어 테러리즘을 조장하는 것은 이슬람 국가들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혼란에 적지 않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리 형편은 어떤가? 최근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에 관계된 뉴스들을 보면,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국민이 알고 있는 정치 체제는 분식된 외면일 뿐 실질적으로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관피아라는 말이 많이 퍼져 있지만-그 뒤에 숨어 있는 마피아 체제라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런데도 이만큼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러나 한국은 자살률이 세계적으로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에는 사회나 경제만이 원인만이 아니라 다른 원인도 있을 것이다. 경제가 고르게 된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물질적 세속적 가치로 환원되는 상황에서 누구나 자기 정체성을 바르게 찾고 유지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물질적 토대, 그 위의 정신 질서, 그리고 토대와 상부구조의 저 아래에 있는 깊은 정신의 세계-이러한 것들은 우리 사회에서 위태로운 구조 관계 속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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