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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view &] 한국경제호 선장과 선원은 어디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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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정경민
경제부장

“경비정들이 10분내에 도착할 겁니다.”

 2014년 4월 16일 9시25분. 진도해상교통관제센터(VTS)가 세월호에 알렸다. 세월호 선실 안에도 ‘해경 구조정이 10분 후 도착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구명조끼를 입은 채 복도에서 대피신호를 기다리던 학생들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배는 52.2도밖에 기울지 않았다. 바로 그때 “여객선 밖으로 대피하라”는 방송만 나왔더라면 295명의 사망자와 9명의 실종자를 낸 세월호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운명의 열쇠는 이준석 선장과 선원들이 쥐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20분 뒤 제일 먼저 배를 버리고 도망쳤다. 속옷바람으로 내뺀 선장은 자신의 신분조차 감췄다.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선장과 선원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한 편의 드라마로 승화될 수도 있고 참극으로 막을 내릴 수 있다. 지도자의 어깨에 쏠리는 무게는 ‘골든타임’일수록 무겁고 엄중하다. 지난 1년 세월호 사건을 복기하면서 국민 모두가 뼈아프게 체득한 교훈이다. 한데 세월호 참사 1주년을 맞아 우리는 또 한번 세월호의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몸서리가 쳐진다. 지금 여야 정치권은 물론이고 저잣거리 장삼이사(張三李四)까지 온통 화제는 ‘성완종 리스트’뿐이다. 대통령의 빈자리를 메워야 할 총리조차 ‘장난감 총리’로 조롱 당하고 있다.

 그 사이 한국경제호는 기울고 있다. 어쩌면 맹골수도보다 더 거칠고 완강한 소용돌이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경제의 근간은 일자리다. 일자리 없는 부양책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마당에 주가와 집값만 급등하는 건 훨씬 위험하다. 당장 수술대에 올려야 할 응급환자에게 모르핀을 놓는 격이다. 지금 한국경제는 응급환자다. 일자리 동맥이 꽉 막혀 있다. 내년부터 60세로 정년이 연장되는데다 통상임금 부담이 확 늘어난 탓에 기업은 직원을 채용하긴커녕 자르기 바쁘다. 철옹성 안에 숨어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한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은 청년 실업이나 비정규직 처우 개선엔 강 건너 불구경이다. 게다가 ‘베이비부머’ 세대의 퇴직 쓰나미는 벌써 시작됐다. 앞으로 30년 동안 매년 80만명이 넘는 베이비부머 퇴직자가 쏟아진다.

 덜 내고 더 받게 설계된 공무원·군인연금도 더 이상은 지탱하기 어렵다. 앞으로 국가가 메워줘야 할 공무원·군인 연금 적자 빚만 643조원이다. 지난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빚 총액 530조원보다 많다. 이를 그대로 뒀다간 재정 파탄은 피할 수 없다. 남미나 남유럽의 부실 국가로 전락해 손가락질 당할 건 명약관화하다. 그런데 노동·연금 개혁엔 엄청난 저항이 따른다. 이해당사자가 노조를 앞세워 똘똘 뭉쳐있기 때문이다. 정치바람이 불지 않을 때를 골라 과감하고 신속하게 수술하지 않으면 돌파하기 어렵다. 전국단위 선거가 없는 올해가 노동·연금 개혁의 골든타임이라는 건 이 때문이다.

 한데 안 그래도 위태로운 노동·연금 개혁이 ‘성완종 리스트’란 초대형 암초까지 만났다. 밑도 끝도 없는 망자의 복수혈전 리스트에 정치권·정부는 물론 청와대와 여론까지 블랙홀을 만난 듯 빨려 들어가고 있다. 사태를 수습해야 할 대통령은 “경제외교의 지평을 넓힌다”며 12일짜리 남미 출장을 떠났다. 경제부처 수장인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제통화기금(IMF)·주요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에 참석한다며 미국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사정의 칼끝 앞에 선 총리는 제 앞가림도 바쁘다. 앞으론 ‘경제정당’이 되겠다고 고백성사까지 했던 야당 대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안면몰수다. 노무현 정부 시절을 들먹이며 야당까지 ‘성완종 늪’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여당의 물귀신 작전은 보기조차 민망하다.

 한국경제호의 선장이 대통령이라면 관료와 여야 정치지도자는 선원들이다. 야당의 협조 없이는 노동·연금 개혁은 한 발짝도 앞으로 못 나간다. 배는 기울고 있다. 절체절명의 순간 모두가 자기의 정치적 생명과 보신에만 혈안이 돼있다면 세월호의 선장·선원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정경민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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