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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정신대 노수복할머니 회한의 일대기<9>|이국의 결혼|34살 노총가과 새 보금자리 꾸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핫차이는 나의 제2의 고향이다.
내가 고국에서 살았던 21년에 비하면 벌써 핫차이 생활은 37년을 넘어서고 있다. 내 인생의 3분의2를 여기서 보낸 셈이다.
그러나 나의 첫 핫차이 생활은 전과 다를 바 없이 고생으로 시작됐다.

<돈 없는 화교청년>
두어 달을 이곳저곳으로 헤매고 다녔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포시에서처럼 다시 가정부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요행히 조그마한 음식점의 종업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주인은 운씨라는 화교였다.
이 운씨는 아직도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있는 오랜 친구이자 나의 시매부, 즉 남편「첸」씨의 매부가 된 사람이다.
나는 운씨의 음식점에서 열심히 일했다. 틈틈이 주방일을 배워 어느새 손님용 음식을 내 스스로 만들어 내놓을 수 있었다.
운씨 집에서 일을 거들던 나는 자주 운씨가 속해있는 중국인 친목회 모임에 불려나가 음식일을 도왔다.
이때 나와 같이 허드렛일을 하던 한 총각을 만났다. 현재의 남편「첸·차오」씨였다. 그는 당시 34세의 노총각으로 어렵게 살면서 운씨 음식점 건너편에서 구멍가게 같은 자그마한 음식점을 내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가난한 나머지 그때까지도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작은 키에 약해 보이는 체구였으나 착실하고 말수가 적을뿐 아니라 한번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키는 성미였다. 친목회에서 만나는 일이 많아지면서 나는 그의 성품에 호감이 갔다.

<연화각서 식올려>
어느덧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생각에 사로잡혀갔다. 나이 25세에 난생처음 느껴보는「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갈기갈기 찢긴 나의 마음 어느 구석에 사랑이라는 말이 남아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첸」총각도 내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운씨가 우리들의 사이를 거들었다.
1947년 가을, 우리는 날을 잡아 핫차이의 연화각사원에서 남편의 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식을 올렸다.
내 나이 26세, 남편 나이 35세 되던 해였다.
나는 지나간 5년 동안의 고난의 나날이 일순 안개 사라지듯 했고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결혼식을 올린 사원의 이름처럼 연꽃처럼 살리라고 다짐했다. 연꽃이란 흙탕속에서 싱싱하고 아름답게 새로 피어나는 꽃이 아닌가. 나는 정말로 새로 태어났고 나의 모든 죄업이 일시에 구원받은 듯 했다.
자그마한 음식점이지만 노력한 것만큼 잘됐다. 당시 핫차이는 주석광이 있어 흥청대던 곳이라 먹는 장사는 잘 됐다.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는 나를 보고 동네 태국인들은 『싸왓디 콘까올리 (안녕하십니까, 한국 아주머니) 』 또는 『카얀, 콘까올리 (부지런한 한국인) 』 라며 인사해왔다.

<자식 기다린 남편>
그러나 나의 행복한 생활에 위기가 닥쳐왔다.
내가 결혼 10년이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이다. 남편「첸」씨는 은근히 자식을 가졌으면 하는 눈치였다.
행복했던 지난 몇 년 동안의 삶이 물거품이 되는 듯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리고 정신대 시절의 고난이 되살아나 나를 괴롭혔다.
일군에 시달린 정신대 여인들의 몸이 성할리가 없었다. 일군들은 건강이 나빠진 정신대여인들을 「전시작전」의 하나로 아예 처치해버리기까지 했었다.
나는 10년 넘게 수태를 못하게되자 정신대 생활의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고통이 극에 달해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연화각에 찾아가 부처님께 빌었다.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갖가지 악몽에 시달리며 밤새는 날은 점점 늘어갔다. 내 몸은 점점 수척해져갔다.
【핫차이(태국)=전종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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