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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성산 이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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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성산 이씨의 시조는 고려 개국 공신 이능일-. 신라 말엽 성산(현성주군) 일대를 통치해온 호족이었다. 그는 12년 동안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수훈을 세웠다.
고려건국 후 왕건 태조의 딸(정순의 궁주)과 결혼, 부마(=임금와 사위)가 되고 벼슬은 사공(정 1품)에 이르렀다. 뒷날 성산백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성산」을 관향으로 삼는다. 그의 원이름은 「능」 또는 「능필」이었는데 고려 태조가 「삼한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는 뜻으로 「통일」을 상징하는 「일」자를 내려 「능일」로 부르게 했다 한다.
신라 때 「성산」은 고려 때는 「경산」으로, 조선조에는 「성주」로 그 지명이 바뀌었다. 이 때문에 조선 중기 이후부터 성산 이씨는 「성주 이씨」, 「경산 이씨」 등으로 불린적이 있어 원래 「성주」를 관향으로 하는 성주 이씨(시조 이순유)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성산 이씨와 성주 이씨는 그 뿌리부터가 다르다. 다만 두 집안이 똑같이 성주를 근거지로 해서 번성했기 때문에 타성 받이들이 한집안으로 착각하는 예가 많았었다.

<성주 이씨와는 달라>
이 같은 혼돈을 없애기 위해 성산 이씨 대종회측은 1914년 문중회의에서 관향을 시조가 살던 당시(신라)의 옛지명인 「성산」으로 못박았다.
경북 성주는 성산 이씨의 성역이자 1천여년 이상 혈맥을 이어온 마음의 고향이다. 성주읍 경산동 1번지에 자리잡은 「성산재」는 시조 이능일의 위패를 모신 재실로 그가 실제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 「성산재」뜰에는 아득한 옛날 그가 물을 마셨던 우물(신정)이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1천년 씨족사를 전해 주고 있다.
성산 이씨는 아무리 날이 가물어도 그칠 줄 모르는 이 신정의 물줄기처럼 고려∼조선조에서 구준히 맥을 이어왔다.
이견수(태조·대상경)는 고려 초기 성산 이씨를 드러낸 인물. 그는 광과 직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는 데 5부자가 모두 과거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이후 이우당(정당문학·종2품), 이영(판도판서), 이여충(지인주사·인주공파조), 이여신(금산군사 금산공파조), 이여량(안렴부사=고려 때의 지방장관) 등이 「성산 이문」의 고려조 인물.
조선 초기의 인물로는 이우(세종·진주 목사), 이세인(중종·대사간·이조참의)과 이항(중종·병·예·사진판서·좌찬성) 부자 등이 돋보인다.
이세인은 연산군 때 직언으로 이름난 명신이었다. 그는 사연으로 있을 당시 간신 유자광을 탄핵하다 나주로 유배되는 등 전후 두 차례에 걸쳐 귀양길에 오르는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그의 아들 이항 또한 중종 19년 간신 김안로를 탄핵하다 도리어 그들 일파에 몰려 유배지에서 숨졌다.
이영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등과 의병을 모으고 사재를 털어 군량과 병기를 보급했던 창의사. 당시 그의 집안에서는 형 이운, 조카 이춘형 등 12명(십이종반)이 의병의 대열에 나서 가문의 기백을 지켰다.

<5부자가 과거급제>
이사룡은 인조조에 문중혼을 빛낸 숨은 별. 명과 청이 중국 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1640년, 그는 청의 강요로 조선이 명을 치는데 합세했을 때 출전했으나 「명」에 대한 예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올곧은 선비였다. 당시 그의 직책은 포사. 그러나 그는 『인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군을 어찌 공격하겠느냐』며 끝까지 포 쏘기를 거절하다 처형당했다.
그가 숨지자 청 태종도 그의 기개에 감복, 그의 유해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도록 지시했다 한다.
이복(효종·부승지), 이석구(영조·사헌부집의), 이석문(영조·훈련원 주부), 이원조(순조·공조판서), 이진상(조선말 성리학자), 이귀상(고종·홍문관교리) 등은 조선 후기의 얼굴들.
이들 중 이석문은 영조 때 사도세자의 호위를 맡았던 무관으로 사도세자가 뒤주속에서 참사하기 직전 11살난 세자의 아들(정조)를 등에 업고 와 앞에 내보내 『아바마마를 살려달라』는 구명 운동을 벌이게 했던 장본인이다.
그는 사도세자가 숨지자 고향인 한 개 마을(성주군 월항면)로 낙향, 자신의 집 북쪽에 사립문(북비)을 내고 하루도 빠짐없이 세자가 묻힌 북녘을 향해 재배했다고 한다.
성산 이씨는 문무를 겸비한 청족이었다. 이상린은 성산 이씨가 배출한 대표적인 무관. 그는 순조 11년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는데 수훈을 세워 보공장군, 대호군 등에 올랐다. 그의 아들 이득운도 절형장군(종 2품), 첨지중추부사(정 2품) 등을 지냈다.
항일운동사에도 성산 이씨는 매운 자취를 남긴다.
을사조약 체결 후 브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이상설 등과 독립운동을 벌이다 만주에서 객사한 이승희,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통한으로 일생동안 백지관을 쓰고 두문 불출했던 이주희, 파리장서 사전으로 옥고를 치른 이기윤, 3·1운동 당시 성주에서 만세 시위를 선두지휘했던 의사 이봉희,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해 자결한 이경환 등이 일제의 암흑기에 의롭게 살다간 의인들이다.

<이경환, 합방 때 자결>
해방 후에도 성산 이씨는 각계에 진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영식(작고)은 해방 후 한국사회사업대학을 설립, 농아·맹아 등 지체부자유아를 위해 일생 동안 헌신해 온 사회사업가. 그는 2차세계대전 당시 「사이판」 「티니안」섬 등에서 전사한 한국인 무명용사의 유골 5천구를 발굴, 망향의 동산에 안치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의 아들 이태영은 대학을 종합대학(대구대학)으로 발전시켜 총장으로 재임하며 아버지의 사업을 잇고 있다.
이밖에 불교계의 거목 청담 이찬호(전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작고), 이효상(문박·전 국회의장), 이기욱(경박·전 재무부 차관·작고), 이헌재(의박·전 연세대 교수·작고), 이상홍(뉴코리아관광(주) 사장), 이수빈(삼성정밀(주) 사장), 이영욱(법무연수원장), 이영환(전 대검차장 검사), 이원달(중앙일보 부국장) 씨 등이 각계서 활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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