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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개 국영기업의 임상실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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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런 서양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탁월한 경영학자가 초빙되어 회사경영을 맡았다. 과학적경영진단을 해보니 잘못투성이라 회사를 완전히 뜯어 고치는 획기적 경영쇄신계획을 만들었다. 그리곤 급한 출장을 가면서 지체 없는 실행을 지시했다.
얼마뒤에 돌아와 잘 되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경영쇄신 계획은 아주 훌륭히 집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회사경영은 마비 상태입니다』하는 대답이었다 운운….
결과는 정 다르길 기대하지만 기획원에서 만든 정부투자기관 기본관리법이라는 것도 경영학자의 그것처럼 획기적 경영쇄신계획인 것 같다.
국영기업의 경영쇄신을 새로운 법의 제정으로 풀어 나가겠다는 것이다.
흔히들 국영기업이 부실하게 되는 것을 국영기업이 갖는 구조적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사실은 제도적 미비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경영학적 발견인가. 하기야 역사상 위대한 발견은 사소한데서 비롯되는 수가 많았지만 국영기업의 고질을 법하나 만들어 고치겠다는 착상은 잘하면 「콜룸부스의 달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국영기업의 부실은 우리 뿐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의 골칫 거리다. 만약 한국에서 새 법의 제정으로 국영기업들이 소생되는 전례를 만든다면 세계적 주목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과거 경영학을 위해서 많은 임상실험을 했는데 이번엔 경영학을 위해 거대한 실험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외국에서는 1백%보장이 없는 한 제도를 고칠 엄두를 못낸다. 사회제도란 것이 역사적 산물이므로 섬광 같은 아이디어 하나로 벌컥 뒤집어 놓을 수 없다는 합의가 되어 있는 것이다. 제도보다 오히려 운영의 묘쪽을 택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존질서에 집착됨이 없이 새로운 실험을 해 볼 수 있다. 제도가 나쁘다고 생각하면 제도를 고치고 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법을 만들어 지하철공사하듯 한꺼번에 뒤집어 놓을 수 있다. 거기서 생기는 시행착오나 사회적비용, 또 책임문제는 어차피 안따지는 풍토가 아닌가. 참 편리하다.
이번 정부투자기관 기본관리법도 국영기업을 한번 벌컥 뒤집어 놓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사장제도를 도입하고 조직을 바꾸며 사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이른바 쇼크요법에 의한 기사회생책이다.
벌써 여러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25개 국영기업의 임원1백83명은 모두 사표를 내고 재임명 절차를 받아야 하는데 조직의 대폭 개편파 더불어 일손을 잡지못하고 있다. 불안한 것이다.
새로 도입되는 이사회라는 것도 한국적 여건에 얼마나 적응될지 의심스럽다. 모양은 아주 그럴 듯 한데 모든 것을 기민하게 대처해야 할 기업경영에서 성격이 모호한 이사회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시중은행이 민영화되고 나서 소위 이사회와 비상근이사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들이 왜 비상근이사가 됐으며 실제 은행경영에서 어떤 권한과 책임을 갖는지 모두들 궁금해 하고 있다.
한 때 부처마다 양산되었던 정책자문위처럼 만들라니 만들고, 끌고가라니 끌고가는 인상이 짙다. 실제로 기업경영에 있어 의결권과 집행권의 분리가 가능할까.
새 법은 25개 국영기업에 유니폼 입히 듯 조직·직제등을 통일시킨다. 이사회도 양산된다. 업무와 성격, 또 역사적 배경이 다른 국영기업들을 일사불난하게 관리해야 할 필요는 무엇인가. 같은 유니폼을 입혀 신병훈련하듯 할 모양이다.
규격화 좋아하다 보니 요즘같이 격변하는 시기에 국영기업은 다음해의 경영목표률 4개월전에 주무장관에게 제출, 2개월전에 확정짓도록 되어 있다. 기업은 기동성이 생명인데 그 많은 절차를 생각해 보라.
그위에 경영평가위 간사인 기획원3급 공무원은 25개업체의 이사를 겸해야 하는데 한 사람이 그 정도의 일을 하려면 경천위지의 재주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이제까지 국영기업이 잘못된 것이 비전문경영인들의 대거 참여 때문이라 보고 사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키로 했다 한다.
이 점은 이번 경영쇄신계획의 백미편이라 볼 수 있다. 사실 그렇다. 국영기업이 잘못된 것이 사람을 잘못 쓴데 가장 큰 이유가 있다. 적재적소의 인사원칙만 관철되면 경영쇄신은 저절로 될 것이다.
그것을 관리법으로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이제까진 법이 없어서 잘 안됐는가.
무슨 일이 잘안되면 제도나 법탓으로 돌려 괜히 평지풍파 일으키지 말고 그 에너지와 시간을 적재적소원칙을 관철하는데 할원하는게 두루 좋겠다.
새 법의 제정에 의한 경영쇄신계획도 계획자체는 훌륭히 집행되겠지만 국영기업 경영은 오히려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다.
최우석 <부국장겸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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