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Talk Talk] 조선왕조실록 빛낸 '이웅근 CD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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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심서현
디지털콘텐트부문 기자

조선은 기록광의 나라였습니다. 세밀한 역사 기록으로, 그야말로 ‘빅데이터’를 후손에 남겼지요. 2015년은 조선의 사관들에게도 의미있는 해일 겁니다. 『조선왕조실록』 전권 디지털화 20주년, 온라인 무료 공개 10주년이거든요.

지난 1995년 조선왕조실록 우리말 번역본 CD롬이 출시됐습니다. 색인도 있고 검색도 가능해 해외 역사학자들도 놀랐지요. 서울시스템이라는 회사가 3년간 56억원을 들여 제작했습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였던 고 이웅근씨는 국학 자료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겠다며 교수직을 그만두고 회사를 세웠습니다.

 디지털 실록의 가장 큰 수혜자는 작가들이었습니다. 사극 ‘용의 눈물’을 쓴 이환경 작가가 실록 CD롬을 애용했다고 하죠. ‘왕과 비’ ‘인수대비’의 작가 정하연씨도 한 인터뷰에서 “사극 쓰려고 실록 읽는 게 고문이었는데, CD롬이 생겨서 엄청 편리해졌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2005년엔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무료 서비스가 시작됐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8억원의 정부 지원을 받아 전용 웹페이지(sillok.history.go.kr)를 만들었지요. 서울시스템이 만든 CD롬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젊은 작가들의 실록 활용이 늘어난 건 그 이후입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시나리오는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중 “숨겨야 될 일들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 이르다”라는 한 줄에서 영감을 얻어 쓰게 된 것이라 하더군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도민준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비행물체가 날 조선에 데리고 왔다”고 직접 말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화제인 웹툰 ‘조선왕조실톡’ 역시 실록을 자세히 읽고 그린 겁니다.

 서울시스템은 1998년 경영난에 처했습니다. 500만원인 조선왕조실록 정품 CD는 겨우 300장 팔리고, 불법복제 CD는 수십만 장 팔렸거든요. 공공기관이나 대학에서도 대부분 복제품을 썼다고 합니다. 이웅근 대표는 이후 부도와 재기를 반복하다 2008년 78세로 숨졌습니다.

‘별그대’의 경제 효과로 대통령까지 ‘천송이 코트’를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20년 전 한 민간사업가가 뿌린 씨는 얼마나 기억되는지요. 후대를 위해 이런 씨앗을 심는 일이 바로 창조경제 아닐까요.

심서현 디지털콘텐트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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