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소리] 한국 출판 전진기지 '에이전시'가 맡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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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중개인, 증권 중개인, 예술품 경매인은 모두 상품매매를 중간에서 중개하는 사람이다. 쉽게 말해 팔 물건을 가진 소유자와 그 물건을 사고 싶은 원매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중개 수수료를 챙기는 사람이다.

출판계에서는 이런 사람을 영어로 에이전트라 부르고, 이런 사람들이 모인 회사를 에이전시라 부른다. 국내에 에이전시로 문화부에 등록된 업체는 3백여개에 이르지만 활발히 활동하는 에이전시는 10여개에 불과하다.

지난 5월 16일 출판문화회관에서 '해외 저작권 이용,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포럼이 있었다. 이런 주제가 토론되었다는 것은 에이전시에 대한 출판사들의 불만이 많다는 방증이다. 에이전시에 대한 출판사들의 불만은 대략 세가지로 정리된다.

에이전시가 요구하는 선인세가 너무 높다. 에이전트가 편집이나 기획을 너무 모른다. 담당 에이전트가 너무 자주 바뀐다. 고객인 출판사의 불만이니 에이전시가 현재 지닌 문제점을 그대로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에이전시 입장에서 변명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문제가 제기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에이전트는 대리인이다. 그런데 누구의 대리인일까? 에이전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거의 모두가 저작권자의 대리인이라 대답한다. 법적으로 틀린 대답은 아니다. 우리나라 저작권법에도 그런 식으로 정의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출판저작권에서는 이런 정의가 합당치 않다.

출판에서 저작권 중개는 대개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에이전시에서 출판사에 외국 저작물을 소개하는 경우와 출판사에서 에이전시에 일정한 책의 저작권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다.

물론 전자의 경우에 에이전시는 저작권자인 해외 출판사의 대리인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에도 저작권자의 대리인일까? 단연코 아니다. 저작권 확인을 의뢰한 출판사의 대리인이다.

전자의 경우 에이전시는 저작권자의 의뢰를 받아 저작권을 파는 입장이지만 후자의 경우에서는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저작권을 사주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에이전시는 경우에 따라 입장이 달라진다. 그런데도 에이전시들은 이런 차이를 무시한 채 언제나 저작권자의 대리인인 것처럼 행동한다. 진짜 고객이 누구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셈이다.

특정 에이전시가 특정 해외출판사와 독점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해외 출판사 입장에서는 저작권 판매 창구를 단일화함으로써 관리의 효율성을 높이는 장점을 갖지만, 에이전시는 독점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해외 출판사에 일정한 매출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그러자면 선인세가 올라갈 수밖에.

대다수의 국내 출판사는 어떤 에이전시가 어떤 해외 출판사의 저작물을 독점적으로 관리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요즘 들어 이상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

한 출판사가 어떤 책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검토해 한 에이전시를 통해 1천5백달러를 선인세로 제시하며 저작권 계약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한참 후에 다른 에이전시가 그 출판사에 연락을 해왔다. '우리가 그 출판사와 독점 계약을 하고 있으니 우리를 통해 다시 오퍼를 넣어라. 그런데 선인세 1천5백달러를 2천5백달러로 올려라'. 이 과정에서 해외 출판사의 독점 에이전시가 한 일은 전혀 없다. 완전히 해외 출판사의 입 노릇을 한 것밖에 없다. 국내 출판사는 안중에도 없다.

에이전트로서의 의식을 망각한 탓이다. 에이전트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에이전트의 어원을 분석해 보면 '일거리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저작권자의 대리인으로 머물러 있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에이전트가 아니다. 이런 에이전트는 이미 우리 기억에서 잊힌 복덕방 할아버지와 진배없다.

에이전트는 일거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돼야 한다. 우리 출판사는 책에 목말라 한다. 다른 세상에는 팔 곳을 몰라 그냥 묵혀 있는 책들이 쌓여 있다. 에이전트의 존재 목적은 이 둘을 묶어주는 것이다.

그때 에이전트는 그 자신의 대리인이 된다. 얼마나 멋진가! 에이전트가 예술가처럼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에이전트들 중에서 이런 꿈을 갖고 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강주헌(펍헙에이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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