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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이 사랑한 도시 ③ 체코 프라하 | 저녁놀이 아름다운 예술의 파라다이스 - 자유와 에로티시즘, 자기 실현의 열망 뜨겁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월간중앙] 단 한 번뿐인 인생, 즐기지 않을 이유 없다 … 가족 행복이 최우선, 돈보다 가치 추구에 몰두하는 시민의 도시

카렐 다리 위에서 거리 악사의 연주를 들으며 주말을 즐기는 프라하 시민. 카렐 다리란 명칭은 14세기 체코의 위대한 왕 카렐 4세의 이름을 본떠 지은 것이다.

체코 현대문학의 상징 프란츠 카프카는 왜 프라하를 잊지 못했던가? 그는 프라하를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맹수의 발톱에 비유했다. 프라하의 삶과 예술에는 에로틱한 분위기, 소박한 매력이 넘친다. 에로티시즘과 포르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는 사이, 프라잔(프라하 토박이)이 향유하는 소박한 일상의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2014년 10월 통산 서른 번째로 프라하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렇게 자주 이 도시를 찾는데도 매번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유혹에 빠지곤 한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사람들은 무엇에 매혹되는 것일까?

14세기 체코의 위대한 왕 카렐 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자 수도를 프라하로 옮겨 고딕식 일색의 프라하 도시 기반을 만들었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황제 루돌프 2세는 프라하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장식했다. 오늘날 프라하가 이처럼 아름다운 도시로 각광받는 것은 두 황제의 업적이 크다. 프라하를 돌아다니면 제일 많이 듣는 소리가 카렐 4세의 이야기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중세 돌다리도 카렐교요, 중동부 유럽 최초의 대학 프라하대학도 카렐대학으로 불린다.

카렐 다리 근처에 즐비하게 늘어선 고딕식 건축물. 카렐 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자 수도를 프라하로 옮겨 고딕식 일색의 도시를 건설했다.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은 1968년 ‘프라하의 봄’ 사건, 1989년 ‘자유화운동’ 등 체코 역사상 위기의 시대에 프라하 시민들이 자유를 부르짖었던 역사적 공간이다. 2013년 여름 어느 날 이곳에서 수백 명의 체코 젊은이가 K팝 플래시맙(flash mob)을 벌였다. 장관이었다. 귀와 눈에 익숙한 한국 아이돌 그룹의 노래와 현란한 춤사위가 펼쳐졌다. 이들은 그날 오후 비노흐라드 극장에서 열린 K팝 경연대회로 모두 몰려갔다.

극장 계단에서 체코 말을 하니 아름다운 여학생들이 필자를 둘러싸고 사진을 찍자고 한다. 모두 명랑하고 들뜬 소녀들이다. 이 경연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는데 운 좋게 체코미녀 가수와 KBS PD옆에 앉아 2시간의 열띤 경쟁을 감상하고 심사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2012년 창원에서 열린 K팝 세계 경연대회에서 체코, 베트남, 러시아 칼뮈크공화국, 슬로바키아 등의 소녀로 구성된 체코 팀이 일등을 한 이후로 체코에는 최근까지도 K팝 열풍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현실에 나타난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들

거리의 악사가 유난히 많은 도시 프라하. 프라하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혼자서 거리와 골목을 배회해봐야 한다.

1989년 11월 소위 벨벳 혁명(피 흘리지 않고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상징)으로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됐다. 이듬해인 1990년 여름,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체코(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를 처음으로 방문해 한 달간 체류할 기회를 가졌다. 당시 프라하는 옛 사회주의 통치의 잔해가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회색문화의 거리였다. 이방인에 대한 체코인의 무표정과 불친절함에는 당혹스러웠다. 고독감과 소외감을 다룬 <변신> 등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을 현실에서 보는 듯했다.

하지만 자유화 이후 체코인의 태도는 해가 갈수록 달라지고 있다. 미소도 밝아졌고 레스토랑 서비스도 좋아졌다. EU에 가입한 어엿한 유럽인의 일원으로써 자본주의 시스템의 경쟁의식이 체화된 덕분이다.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프라하의 야경은 실로 대단하다. 카렐 다리 위에서 보는 화려한 야경은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맛볼 수 없는 광경을 연출한다. 특히 극장이나 오페라하우스, 콘서트홀, 골목길 등 어디를 가나 묘한 분위기가 배어 나온다. 로마네스크·고딕·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아르누보 양식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조의 건물이 도시에 즐비하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초현실주의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이 든다. 예부터 황제뿐만 아니라 음악가, 예술가, 작가, 시인들이 그처럼 와서 살고 싶어했던 이유일 것이다.

2층 카페 창 밖으로는 구시가지 광장의 아름다움, 고딕 양식의 구 시청 탑에 조각된 16세기에 만들어진 천문시계의 장엄한 모습이 바라다보인다. 그 신기한 시계의 동작을 눈여겨보려고 모인 겨울 관광객의 모습도 초현실주의 소설 속의 주인공 같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 때문에 프라하는 프란츠 카프카나 밀란쿤데라 같은 작가를 배출했는지도 모른다.

독일의 한 카프카 연구가는 “카프카가 프라하였고, 프라하가 카프카였다”고 말했다. 카프카 문학의 이해를 위해서는 프라하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카프카는 1902년 친구 오스카르 폴라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프라하는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 할망구는 맹수 발톱을 가지고 있다. 비켜가든지 무슨 수를 써야 한다. 우리는 비세흐라트 성이나 프라하 성에 불을 질러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이 도시를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자네는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뭔가를 고려해야 할 거야.”

카프카는 애인 밀레나 예센스카(Milena Jesenska)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은 물론 생존마저 위협받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신의 소망을 표현했다. 카프카에게 이 도시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프라하가 아니라 저주받은 도시였다.

“오후 내내 나는 골목길에 넘치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흠씬 느낀다. 한번은 유대인을 옴 걸린 종족이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곳에서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사회주의 시절 체코는 형제국가인 베트남의 젊은이 수만 명을 초대해 교육시켰다. 현재 이들은 프라하에서 사회적 냉대에도 불구하고 주로 작은 가게 등을 경영하며 악착같이 잘 살고 있다. 집시들은 역사 이래 이곳에서 어떤 때는 권리를 부여받고 어떤 때는 엄청난 차별을 받았다. 그러한 분위기에서도 베트남인도 집시도 프라하를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20세기 초에 러시아가 혁명과 내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프라하는 러시아 지식인 망명자들의 메카였다. 하지만 지금은 소련 붕괴 이후 엄청난 부를 축적한 마피아 급 러시아 기득권자(부정으로 재산을 모은 자들)들이 프라하에 득실거린다. 이들은 부동산을 ‘묻지마’ 식으로 사들인다. 이처럼 프라하는 외국인들이 늘 탐을 내는 도시이기도 하다. 쇼핑가에서, 고급 식당에서 돈을 물 쓰듯 하는 러시아 졸부들을 만나기가 다반사다.

아르누보 예술의 메카

거리에 설치된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프라하 소녀. “체코인이면 그는 음악가”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체코 사람의 음악 사랑은 유별나다.

사람들은 프라하를 음악·건축·미술·문학의 도시라고 한다. 거리와 골목이 살아 움직이는 박물관과도 같다. 프라하는 유럽에서 조약돌 길이 가장 많다. 전쟁이나 자연재해에 의해 부서지지 않아 각종 건축양식의 오리지널 건축물이 가득해 유럽 건축학도들의 메카가 됐다. 단체 관광단에 속해서는 이 말의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혼자서 골목을 배회 해봐야 프라하의 진면목을 보고 느낄 수 있다. 건축물 하나하나에 상징과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특히 프라하에서는 오페라나 인형극 또는 콘서트 등을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 필자도 프라하에서 수십편의 오페라와 수많은 콘서트를 즐기면서 공연예술에 눈을 떴다.

프라하 어디를 가나 아르누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프라하에는 유럽 아르누보의 창시자요, 대가였던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의 박물관(미술관)이 있다. 모라비아 출신인 무하는 1895년 파리 르네상스극장에서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알리기 위한 석판 포스터로 큰 호평을 받고 난 뒤 하루아침에 스타로 떠오른 인물이다. 몇 년 전 어느 더운 여름날 프라하 거리에서 배낭을 멘 얼굴이 까맣게 탄 한국 고등학교 여학생을 만났다. 어떻게 혼자서 프라하에 여행을 오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파리에서 무하의 포스터 한 점을 보고 그의 박물관이 보고 싶어 무작정 프라하에 왔다고 했다. 그는 한 발 더 나가 나중에 프라하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니 정말로 당찬 청춘이다.

프라하에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각종 아르누보 양식의 실험 건축물을 즐길 수 있다. 입체주의 그림·조각·가구·건축물이 즐비하다. 구시가지에 있는 입체주의 박물관을 찾아가면 전시된 입체주의 가구와 함께 그 건물 자체가 방문객을 매혹한다. 프라하는 유럽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폴란드 등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화가를 만날 수 있다.

유럽 어느 도시를 가봐도 체코 프라하보다 하루에 공연되는 클래식 음악회가 많은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체코인이면 음악인이다”라는 체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체코민족의 음악적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체코에는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외에도 피비히(Zdnek Fibich)와 포에르스터(Josef Bohuslar Foerster), 야나체크(Leos Janacek)과 마르티누(Bohuslav Martin ) 등 수많은 위대한 작곡가의 전통이 있다.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연주가가 존재함은 물론이다. 모임이나 행사, 축제에서 음악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오스트리아의 궁정에서 냉대를 받던 모차르트가 프라하에서 대환영을 받은 것도 프라하 사람들의 음악적 수준과 실험정신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체코인의 전설이나 동화 속에서도 음악의 테마가 자주 등장한다.

18세기 모차르트는 빈에서 실패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프라하에서 성공시켰다. 자신의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적 음악’을 프라하 시민이 진정으로 이해할 줄 안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프라하에서 머물며 유명한 오페라 <돈 죠반니>를 작곡하고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뒀다. 모차르트는 프라하의 정신적 시민이 되었고 그가 머물던 곳에는 지금 모차르트 기념박물관이 서 있다.

“체코인이라면 그는 곧 음악인이다”

1787년 모차르트의 걸작 오페라 <돈 죠반니>가 초연된 프라하의 유서 깊은 극장 스타보브스케. 1984년 아카데미 8개 부문을 수상했던 영화 <아마데우스>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2001년 5월 12일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축제의 개막식에 참석했다. 이날 스메타나 음악당에서는 개막식 기념공연으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 연주됐다. 대통령 하벨이 연극배우 출신 미녀 영부인과 함께 2층 왼쪽 박스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2층 오른쪽 박스석에는 프라하 시장 부부가 앉아 있었다. 중간휴식 시간에 샴페인이나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걸어오는 하벨 대통령과 인사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 정말 음악을 좋아하는 국민이고 대통령이다.

괴테는 프라하를 ‘황금의 도시’라고 칭송했다. 해가 질 무렵 프라하의 남산인 페트르진 언덕에 올라 프라하 시가지를 바라보면 수많은 첨탑과 붉은 지붕이 금빛으로 반짝이기 때문일 것이다. 2001년 프라하에 거주할 때는 아들의 영국인 친구가 가족들과 함께 우리를 찾아온 적이 있다. 3박4일 일정으로 프라하 문화를 탐방하러 왔는데 우리가 살고 있던 기숙사에서 4∼5명이 자는 방 전체를 차지했는데, 그들은 예정보다 10여 일을 더 프라하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프라하의 분위기가 런던과 달리 이국적이고 매력적인 멋과 맛이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들은 체코 음식에 푹 빠진 듯했다. 콜레노(돼지무릎 요리)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체코 음식이 영국음식과 비교가 안될 만큼 싸고, 맛있고 풍성하다는 것이었다. 콜레노는 체코맥주와 함께 먹으면 금상첨화가 된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싶으면, 시내 곳곳에 위치한 가판대나 간이식당에서 핫도그나 소시지를 먹을 수도 있다. 그들은 이렇게 푸짐하게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민족은 처음 보았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사실 런던의 물값은 프라하보다 5배 이상이고 지하철 등 대중 교통비도 10배 정도 비싸다.

파리에 거주하는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가 한 말처럼 프라하는 무척 야하고 에로틱한 도시이기도 하다.

“프라하의 에로틱한 분위기는 분명히 여기(파리)보다 더 강렬하다. 거기(프라하)에서는 에로티시즘이 자유와 자기실현을 위한 유일한 영역이 되었다. 그리고 정치는 발기불능이 돼버렸다. 내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 왔을 때(1975년) 나는 어쩌면 다시 찾을 수 없는 에로틱한 파라다이스를 떠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그 유명한 자유스런 사회적 관습의 양상에도 불구하고 에로티시즘은 훨씬 보수적이며 수줍은 체하며, 가정은 신성시된다. 이러한 자유화는 전혀 쾌락주의가 아니다. 사회적 모토로서, 개념으로서 쾌락이 주창되면 될수록 실제 생활 속에서는 더욱 찾기 어려운 것이 된다.”

주변에 널려있는 누드촌이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 준다. 프라하 누드촌은 대부분 호수가에 자리 잡았다. 느슨한 울타리로 경계선을 대충 만들어놓고 한쪽에서는 수영복을 입은 채로, 다른 한쪽에서는 수영복을 벗고 수영과 선탠과 산보를 즐기는 곳이다. 심지어 3대에 걸친 온 가족이 어울려 자연을 즐긴다. 중세 때부터 내려온 전통적 유산이라고 하지만 우리네 잣대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다.

프라하 선술집에서는 토플리스 웨이트리스를 만날 수 있다. 프라하 중세 미술관에 가도 젖가슴을 반쯤 내어놓은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볼 수 있다. 건물 앞 조각상이나, 전시회 조각상과 회화는 에로틱한 것이 너무나 많다. 쿤데라의 문학에 묘사된 것처럼 에로티시즘과 포르노의 경계선상에 있는 예술 작품이라 할까?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사랑과 성을 별개로 생각하는 주인공들이 나온다. 소설은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파리보다 강렬한 프라하의 에로티시즘

프라하에는 바로크 양식의 조각상이 도처에 널려 있다. 사진 정면에 보이는 고딕식 건물이 미쿨라시 성당이다.

더 기가 막히는 이야기는 체코의 신문기사에서 읽었다. 프라하에서 사진가의 성인으로 추대받는 위대한 에로티시즘 작가 얀 사우덱(Jan Saudek)은 세 번이나 결혼하면서 세 명의 부인과 딸들의 아름다운 나체를 수많은 사진으로 남겼다. 그의 사진은 인화 과정에서 천연색과 색다른 배경을 조화시켰는데, 내가 보기에는 포르노 같지만 정작 프라하에서는 예술성 높은 에로티시즘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맏아들이 그가 이혼한 둘째 부인과 결혼한 스토리가 일간지에 상세히 보도되기도 했다. 체코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사례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태연하게 말한다. 에로티시즘이 도를 넘은 요지경의 프라하 결혼, 이혼의 모습이다. 사실 프라하는 공산주의 시절부터 프리섹스 풍조는 서방 어느 국가 못지 않게 강했다.

우리가 살았던 대학 기숙사 지하에는 술집을 겸한 커다란 식당이 있다. 이곳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미인을 초청하는 재미있는 쇼가 열린다. 대개 록뮤직이나 디스코 춤판이 벌어진다. 10분간 에로틱 쇼를 한다. 옆에서 구경하는 남학생에게 미녀가 하나씩 자기 옷을 벗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다. 드디어 완전히 벗어 완벽한 육체미를 드러낸 이브가 이번에는 남학생 한 두 명을 잡아서 아담 역할을 시킨다. 그들의 아랫도리를 벗기는 것이다. 만일 남학생이 부끄러워서 도망가려 하면 많은 학생이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돋운다. 공부에 지친 학생들의 스트레스 해소용이다.

지상파 공공TV의 일기예보를 1분간 하는 데 여성이 나체로 나와서 브래지어와 속옷 등 옷을 하나씩 입으면서 일기를 예보한다. 다 입고 나서는 내일 날씨가 어떠하니 이러한 색깔의 의상을 입기를 권한다고 말한다. 아주 재미있고 애교 넘치는 일기예보다. 이런 일기예보도 처음에는 여자가 주로 했지만 나중에는 남자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체코는 이렇게 건전하면서 동시에 리버럴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일상생활에서 에로티시즘과 포르노의 경계에 걸쳐 있는 삶을 목격할 수 있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또다시 결혼 또 이혼, 또 결혼 이러한 삶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곳이 프라하다. 내가 아는 어떤 교수의 아들은 두 번이나 이혼하고 세 번째 결혼해서 각각 아들딸을 하나씩 낳았다. 이 교수의 환갑 날에 아들은 두 명의 이혼녀와 그들이 데리고 온 자식과 지금 아내와 자식들 모두를 데리고 축하연에 참석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물론 이 노교수는 아들 세대의 이러한 자유로운 결혼과 이혼 생활을 백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것이 프라하, 체코의 현실이라고 한다. 이처럼 이들은 이혼 이후에도 서로 원수가 되는 게 아니라 다시 만나서 식사도 하고 잠도 자는 경우도 있다. 이해하기 힘든 이들의 풍습이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니까 아등바등하지 않고 즐기며 사는 풍조 같다.

프라잔(프라하 토박이)과 맥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가장 맛있는 맥주를 만드는 체코인의 프라이드는 대단한 것이다. 체코인은 유사 이래 계속해서 맥주를 만들고, 마시고, 노래하고, 맥주를 통한 삶을 살아왔다. 도시 뒷골목에서는 아침나절부터 맥주병이나 맥주 캔을 든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체코인은 주로 선술집에서 향기 좋은 맥주 한두 잔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저녁 대신 ‘흐르는 빵’이라는 맥주를 마시며 브람보라크(감자전) 같은 가벼운 음식을 곁들이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맛 있는 맥주의 도시

카렐교 건너편 강변에 자리 잡은 체코의 국민음악가 스메타나 기념박물관. 그의 생일인 5월 12일부터는 3주 동안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제’가 열린다.

프라잔이 와글거리고 담배연기 자욱한 시내 중심에 위치한 ‘황금호랑이(U Zlateho tygra)’ 선술집이나 독일인이 우글대는 ‘우 플레쿠(U Fleku)’(1499년부터 선술집), 체코 작가 야로슬라프 하셰크의 대표작 <착한 병사 슈베이크의 모험>의 배경이 되었고 소설의 여러 장면이 진한 에로틱한 문구와 그림으로 장식된 ‘우 칼리하(U Kalicha)’ 선술집에서 1천cc짜리 맥주 한 잔을 들이킬 용기가 있으면 프라하의 진면목을 체험할 수 있다. 영어가 통하지 않으면 손짓 발짓으로 얼마든지 소통 가능한 곳이 프라하다. 1년에 1억 명이 거쳐가는 나라의 수도이니 온갖 인종이 끊임없이 들락날락한다. 여종업원도 외국인의 주문에 익숙하고 진한 농담도 가볍게 받아주고 원하면 키스도 해준다. 다 맥주문화가 나은 프라하의 풍습이다. 선술집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거부감이나 소외감이 별로 없다. 맥주가 있는 곳이면 만사형통이다.

프라하에는 체코식당뿐 아니라 이국의 맛을 볼 수 있는 여러 식당이 즐비하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중국식당과 일식당은 물론 한국식당도 많이 생겨나고 있으며, 인도와 베트남 식당 등도 성업 중이다. 러시아, 헝가리처럼 체코도 신흥 부유계층이 고급 승용차를 몰고 와서 일본식 식당에서 회나 스시 몇 조각을 즐기는 것이 유행한다. 그래서 한국식당들도 대부분 일본요리를 함께 판다. 요즘은 한국식 도시락도 프라하 시민이 선호하는 음식이 되어간다.

가장 대표적인 체코 음식은 돼지고기-크네들리키-양배추(vepro-knedlo-zeli) 요리다. 구운 돼지고기와 양배추에 특별한 소스를 얹고 여기에 크네들리키가 추가된다. 굴라시(gulas)는 헝가리 구워시라는 전통음식이 기원이지지만 체코에서는 굴라시가 민족 음식이다. 가짓수도 다양하고 맛도 상당히 좋다. 헝가리처럼 소고기를 사용한 스튜로 매운 파프리카나 양파 등을 사용해 맛이 매콤한 굴라시도 있다. 소고기 요리 중에는 안심요리 스비츠코바(svkova)가 대표적이다. 소의 안심살을 두툼하게 잘라 구운 다음 여기에 독특한 향이 나는 소스와 크림과 향초 잎을 얹어 감자나 크네들리키와 함께 먹는다.

최근에는 자본주의 생활습관과 경쟁의식이 강해져 덜 심하지만 1989년 개방 직후 체코사람들은 금요일 오후에 좀처럼 다른 사람들과 약속하는 걸 꺼려했다. 대신에 가족 단위로 짐을 꾸려서 주말농장이나 별장으로 간다. 나도 주말에 친구 가족들을 만나려면 어김없이 별장으로 초대를 받아 가야 했다. 그들은 일주일 내내 주말에 별장으로 갈지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갈지를 놓고 고민하고 준비한다. 그리고 1년 내내 여름 한 달 휴가를 어디에서 어떻게 보낼까 계획을 세운다. 상점은 어김없이 정해진 시간에 문을 닫는다. 심지어 서비스업인 이발소, 미장원, 세탁소 할 것 없이 금요일의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휴업이다. 비즈니스맨도 금요일 오후는 거의 약속을 잡지 않는다. 돈보다 가족 또는 자신의 휴가와 쉼, 취미 생활이 더욱 중요한 가치인 것이다.

일상의 작은 일에서 행복을 찾는다

프라잔에게 맥주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를 만든다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산다.

프라하에서 여러 번 별장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여름이면 남자고 여자고 거의 반나체로 강가 별장에서 선탠을 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봄 가을, 별장에서는 주로 자전거를 많이 탄다. 여유 있는 젊은이들은 래프팅을 자주 즐긴다. 이러한 가족단위의 휴가가 이들의 행복인 것 같다. 낚시라든가, 숲에서 버섯 따기, 오막살이 별장 주위에 채소와 꽃 가꾸기, 숲 속에서 산보하기 등 체코인은 자그마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다.

체코에서 집에 초대받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체코인이 자신의 집에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것은 그를 친구로 여기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어지간히 오랫동안 친분을 맺은 사이가 아니라면 집에 초대하지 않는다. 또 도시의 초라한 가정을 꾸리는 체코인은 더더욱 손님맞이를 꺼린다. 집안을 청소하고 정돈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다. 초대받았을 경우, 흔쾌히 응하면서 조그만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식사 초대에는 대개 포도주 한 병이면 되고 더 고급술인 샴페인이나 위스키, 또는 체코의 과일브랜디 슬리보비쩨나 벡헤로프카도 무난하다.

초대받았을 경우 여주인을 위해서는 반드시 꽃다발이나 초콜릿을 사가야 한다고 동행하는 체코인이 귀띔해준다. 생일파티나 결혼기념일 등 특별한 날의 초대에는 다른 선물도 가능한지만 선물로는 값비싼 것을 준비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미 친한 친구로 여긴 사람으로부터 비싼 선물을 받을 경우 이를 언젠가 되돌려 줘야 하는 것이 체코인의 미덕이다. 비싼 선물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다. 우리가 하듯 어린이나 노인에게 돈(현금)을 주는 것은 큰 실례다. 가정에 들어가면 소파에 앉아서 독주를 한 잔씩 하며 잠시 담소를 하다가 식탁으로 옮겨 식사를 한다.

돈보다 가족 또는 자신의 휴가와 쉼, 취미 생활이 더 중요하다. 한국에 갔다 온 대부분의 체코인은 일만 하고 놀 줄 모르는 한국인이 자기들보다 훨씬 더 부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불쌍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한국에 온 체코외교관들, 대사는 물론이고 모든 직원이 여름에는 한 달 휴가가 기본이다. 사실 나는 이들의 이러한 휴가 찾아먹기가 정말 부러웠다.

체코의 위대한 작가 카렐 차페크(Karel Capek, 1890∼1938)는 늘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작은 일을 잘할 경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체코인들의 지혜요, 삶의 철학이다.

글, 사진=김규진 - 1980년 한국외대 노어노문학과 대학원 재학 중 도미, 1980∼88년 미국 시카고대에서 슬라브어문학을 전공했다. 1989∼2014년 한국외국어대 체코슬로바키아어과 교수를 역임하며 그 기간 중 동대학 동유럽학대학 학장, 글로벌 캠퍼스 부총장 등을 지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이며, 대한민국오페라연합회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저서로 <한권으로 읽는 밀란 쿤데라><카렐 차페크 평전><러시아 동유럽 문학 예술기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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