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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건망증 이영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남편은 결혼이후 십수년동안 단한번도 결혼 기념일이나 내 생일같은, 말하자면 내게 있어서 의미가 깊은 이 두 날짜를 기억해 준적이 없다. 결혼초에는 그것이 어찌나 섭섭하고 자존심이 상하든지 입을 꼭 다문채 천장만 바라보고 밤을 하얗게 샌적도 있었지만 하도 여러번 겪다보니 나도 이제 어지간히 지친 셈이다.
몇해전엔가는 어떻게 내 생일을 기억해냈는지 아침에 출근하면서 저녁에 외식시켜 줄테니 아이들 데리고 7시에 동네 버스정류장 근처 다방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나도 무척이나 속으로 기뻤지만 아이들도 덩달아 좋아하였다. 저녁때가 되어 약속장소에 나갔으나 30분이 지나 1시간이 되어도 우리들을 외식으로 인도할 인솔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약이 바짝 올라 저녁이고 뭐고 입맛이 싹 없어졌으나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하는 바람에 아이들이 하자는 대로 외식대신 통닭집에 들러 캄캄해서야 집에 돌아왔다
하기야 남편은 해마다 자기생일도 모르고 지낸다. 얼마전엔 남편생일이 되어 아침상을 받은 남편은 『야! 오랜만에 미역국을 먹으니 시원하구만』하더니 친정에서 갖다놓은 케익을 바라보며 『오늘이 누구 생일인가?』하고 중얼거리며 그냥 출근하였다.
남편은 농담상아 지금은 젊어 열심히 일하느라고 번번이 실수를 하지만 늙어 시간이 좀 생기면 그때는 자기가 직접 부엌에 들어가서 내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푸짐히 음식을 마련해주겠단다. 그걸믿는건 아니지만, 앞으로 오는 봄에 있을 우리 결혼기념일을 남편이 역시 기억해줄리는 없지만 혹시나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것도 아니니 역시 그남편에 그 아내인것같다.

<서울강동구둔촌동77의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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