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남자의 취미, 그리고 중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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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형경
소설가

삼십대 후반의 가장인 그는 가끔 딜레마에 처한다. 남자 개인으로서의 욕구와 가장으로서의 역할이 서로 충돌하는 듯 느껴질 때 그러하다. 혼자 등산을 떠나고 싶은데 아내가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잔소리할 때, 갖고 싶은 물건을 사려는데 벌써 아내의 살림 걱정하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릴 때 그렇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한 만큼 그 정도 여가 생활은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큰소리치고 싶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남자들이 여가 활동을 즐긴다. 어떤 남자는 사물을 사랑하고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여자가 보기에는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 작은 모형들을 수집해 두고 즐거워한다. 그들에게 사물은 일종의 ‘대체 대상’이다. 가까운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대신 사물에게 애착 감정을 품는다. 성장기에는 누구나 대체 대상을 갖는 시기가 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에도 사물들을 사랑하는 남자라면 그는 건강한 애착 관계를 맺기 어려워하는 사람일 것이다. 사실 수집 취미는 사물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통제 조절하는 행위다. 사물과 모형들의 세계를 마음대로 지배하고 경영하면서 내면의 불안감을 해소해 나간다.

 어떤 남자는 자연을 탐험하는 취미를 즐긴다. 등산·낚시처럼 가벼운 도전부터 심해와 우주까지 남자들의 모험 대상에는 한계가 없어 보인다. 야생의 자연 속에서 남자들은 내면의 파괴 본능, 대결 의식을 안전하게 풀어놓는다. 육체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면서 내면 깊은 곳에 잠재된 야성을 마음껏 경험한다. 총칼을 수집해서 집안에 장식해 두는 행위에는 수집 취미와 모험 욕구가 결합되어 있는 셈이다.

 또 어떤 남자는 여럿이 어울려 활동하는 취미를 즐긴다. 조기 축구회나 술자리 모임, 함께 즐기는 도박 같은 것.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술이나 도박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울려서 만들어 내는 공간이다. 집단 속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심리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을 갖고자 한다. 성장기에 원가족에게서 친밀감과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대체 공간’에서 그것을 얻고자 한다.

 남자에게 나쁜 취미란 없다. 당사자의 심리적 삶에 절박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그 행위에 몰두한다. 취미 활동은 남자가 간접적으로 내면 감정과 접촉하는 통로이고, 결핍을 보상받고 그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 준다. 단,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고 취미 활동에서 배울 수 있을 때에만 그러하다. 성찰 없는 몰입, 한계 없는 추구는 중독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