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의 입' 9년] 22. 한국적 근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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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 박정희 대통령이 남긴 "조국근대화" 휘호.

1972년 5월 평양에 잠행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북한 김일성에게 "박 대통령은 외세의 간섭을 대단히 싫어한다"고 말했다.이런 말은 김일성 등 북한 측은 물론 일부 남한 사람들조차 박 대통령이 외세배격론자이며 나아가 반미주의자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위험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박 대통령이 '우리식'을 강조하면서 근대화와 경제개발을 추진했기 때문에 이런 오해는 더욱 힘을 얻을 수 있는 사정도 있었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외세배격론자였던가. 반미주의자였던가. 아니다. 사안에 따라 외국의 사고를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한 것과 무조건 외세를 배격하는 것과는 다르다. 박 대통령은 외세를 배격하는 국수주의적 태도를 가진 적이 없다. 그는 오히려 외국의 협조를 중시한 협조주의자였다.

70년대 초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하면서 박 대통령은 "우리에게 알맞은 옷을 만들어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전쟁 때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미군이 원조해준 M1소총은 우리의 체격에 비해 너무 컸고 무거웠다. 이제부터는 우리 몸에 맞는 무기를 우리가 생산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군수장비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근대화가 필요하지만 근대화가 꼭 서구화요, 서구의 모방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우리의 문화적 토양에 알맞게 근대적 서구 문물을 수용해야 하며, 우리의 역사.문화적 풍토에 알맞도록 선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근대화는 정치면에서는 민주화, 경제면에서는 산업화를 이루고 문화면에서는 과학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사고방식의 기본이 유교적 봉건체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단숨에 이 근대화를 완수한다는 것은 꿈이다. 서구사회 스스로도 근대화를 마무리하는데 100여년의 세월이 걸리지 않았던가.

어렵고 험난한, 그렇다고 피해갈 수 없는 그 길을 가야만 했던 박 대통령은 항상 4.19 때 시민들의 아우성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먼저 산업화의 길을 택했다. 그것이 지극히 실리적이며 현실주의적이요 우리 실정에 가장 알맞는 근대화의 길이라 믿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정치적 민주화도 함께 추진했으면 하는 식자(識者)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이었다. 북한은 이미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했다고 거짓 선전을 해대고 있는데 이러한 선전의 경쟁에 따라가려고 우리가 실용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박 대통령은 선전보다는 실질을 택했다. 그래서 정치제도의 근대화는 자연히 후순위로 밀려나지 않을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은 정치적 민주화는 산업화를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다. 민주주의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의 원리를 간파한 것이다. 이런 박 대통령을 비판자들은 반미주의자.독재자로 비난했으며 일부에서는 외세배격론자로 오해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장님들의 코끼리 더듬기'가 이제는 거의 끝날 때가 된 것 같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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