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18 당시 미국의 역할 의심하며 대학가서 ‘反美’ 등장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17호 04면

1985년 5월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산하 ‘삼민투쟁위원회’ 소속 대학생들이 서울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 5·18 사태에 대해 미국 측의 사과를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다. [중앙포토]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피습 사건으로 반미주의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리퍼트 대사를 피습한 김기종에게 정신질환이 있든 없든, 그를 반미 민족주의자로 부를 수 있든 없든 간에 한·미동맹의 창구 격인 주한 미국대사를 겨냥했다는 데서 불가피하게 이 사건은 반미주의와 연관해 읽히고 있다.

[리퍼트 미 대사 피습] 한국 내 반미주의 뿌리는

“두개골 골절, 복부 총상, 안구 파열, 간·신장 파열, 흉부 총상, 직장·간·회장 파열, 뇌 좌상과 두개골 골절, 좌하지 절단, 척추 손상과 하반신 마비, 상박골 개방성 분쇄골절, 요골·척골 분쇄골절, 좌하지 발목 절단, 대장·소장 파열….”

1985년 5월 안기부에서 작성한 5·18 피해자 명단(사망 191, 중상 122, 경상 730명) 중에서 ‘경상’으로 분류된 사람들의 부상 부위다. 한국사회에 왜 폭력성을 수반한 반미주의가 확산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말해주는 자료다. 5·18 광주는 국가의 가면이 벗겨진 장소였고, 국민의 생명을 빼앗은 국가 권력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고 믿어졌다.

80년대 제3세계에서 반미주의는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동의어로 쓰였다. 많은 독재정권이 친미 성향을 보였고 대중은 그런 정권에 반대하는 것이 곧 반미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반미주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광주학살에의 미국 개입 의혹은 자연스럽게 반미운동으로 이어졌고, 여기에는 대개 폭력이 수반됐다.

반미 폭력투쟁의 대상은 주로 미국 문화원이었다. 70년대에 미 문화원을 출입하며 미국인들과 커피 마시는 것이 신분 상승처럼 여겼다면 80년대 미 문화원은 문화제국주의의 표상이 됐다. 미 문화원을 대상으로 한 반미 폭력투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82년 3월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이다. “살인마 전두환 북침준비 완료”라고 쓰인 유인물이 뿌려졌고, 불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그 과격성과 대담성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1차 부미방 사건’이라 불렸다. 그러나 미 문화원 방화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광주항쟁 직후인 80년 말 광주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이 있었다.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은 한국군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던 미국이 사태를 방관했기 때문에 학살이 가능했다고 생각했다. 80년 12월 9일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이 중심이 돼 광주 미 문화원 지붕에 구멍을 뚫고 사무실 바닥에 휘발유를 뿌린 뒤 라이터와 성냥으로 불을 질렀다. 언론은 단순 누전으로 보도했지만 이후 광주 미 문화원은 반미운동의 상징이 됐다.

광주시 동구 황금동에 위치했던 광주 미 문화원은 이때부터 90년 폐쇄될 때까지 모두 31차례에 걸쳐 화염병 습격과 방화, 옥상 점거를 당했다. 결국 광주항쟁 9주년인 89년, 항쟁기념투쟁기간을 버티지 못하고 잠정 폐쇄됐다가 다음 해 영원히 문을 닫았다.

광주와 부산 외의 미 문화원도 반미투쟁의 파고를 비켜가진 못했다. 83년 9월 대구 미 문화원에는 폭탄이 투척됐으나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85년 5월에는 대학생 73명이 서울 소공동의 미 문화원 2층 도서관을 기습 점거했다. 이들은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사과와 함께 한국 군부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 철회를 요구하면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은 3일 동안 이어졌으며 남북 적십자회담이 열리는 5월 27일 자진 해산하고 경찰버스에 올랐다.

초기엔 폭력 없는 정서적 반미
‘1차 부미방 사건’과 달리 서울 미 문화원 점거농성은 폭력성을 띠지는 않았다. 도서관 집기로 바리케이드를 쌓는 것에 그쳤으며 미국 측도 경찰 병력을 불러들이기보다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문제를 풀고자 했다. 이 사건은 이후 광주항쟁을 공개적으로 거론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차 부미방 사건’ 때 방화와 사망자 발생으로 광주 문제가 묻혀버렸다면 서울 미 문화원 점거 농성 때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광주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때까지의 반미운동은 이데올로기적 성격보다는 반미 감정의 요소가 다분했다. 미 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은 반미를 주장하지 않았고, 언론사에도 필담으로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반미운동이 정서적인 것을 넘어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은 8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미국은 독재정권의 배후일 뿐만 아니라 분단체제 지속의 주범이라는 사고가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남미나 중동, 아프리카 등지의 제3세계 반미주의와 달리 한국의 반미주의가 갖는 특징은 바로 독재정권 외에도 분단체제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반미주의는 독재정권이 물러난 뒤에도 계속해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미 대사 습격 사건의 피의자가 민족주의자나 통일운동가이면서 반미주의자로 비쳐지는 것도 한국 반미주의의 이 같은 성격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통일은 ‘우리의 소원’이면서 이른바 ‘종북 세력’의 최종 목표다. 이 때문에 김기종은 과격한 민족주의자나 통일운동가에 머물 수도 있고, 배후를 따로 둔 반미 종북 세력이 될 수도 있다.

김기종은 88년 우리마당 사건으로 병적인 피해의식을 갖게 됐으며, 2007년에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분신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마당 사건은 그가 대표로 있던 단체인 ‘우리마당’에 괴한 4명이 침입해 단체 회원을 폭행하고 성폭행한 사건이다. 이것이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이었다면 분신은 자기에 대한 폭력이고, 미국대사 습격은 외부로 향한 폭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피해자가 경험한 이 세 가지의 폭력은 한국 반미운동에서 똑같이 목격된다.

반미주의를 유발한 것은 5·18 광주의 국가폭력이다. 폭력은 정당성을 잃었을 때 나타난다. 그리고 정당성 없는 국가폭력에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은 오히려 합리적일 수 있다. 정당방위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비합리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5·18 이후의 저항운동이 폭력성을 띠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저항으로서의 폭력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외부로 향한 폭력과 자기폭력, 즉 자살이다. 5·18 이후 97년까지 모두 32명의 대학생이 저항운동 속에 자살했으며 이 중 21명이 분신했다. 처음에는 광주학살에 항의하는 죽음이었으나 뒤로 가면서 정권타도, 미제축출, 조국통일 등이 주요 구호가 됐다.

반미주의와 폭력적 저항운동은 독재정권의 폭력에서 비롯됐지만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됐다. 여전히 남한 정부를 미제의 대리인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했고 폭력투쟁도 계속 유효하다고 봤다. 거기에는 미군 범죄도 한몫했다.

2002년 효순·미선양을 장갑차로 치어 숨지게 한 미군 2명에 대해 미군 군사법정이 무죄평결을 내리자 영화감독 박찬욱(오른쪽)·류승완씨(가운데)가 삭발을 하고 광화문 미국대사관 앞에서 항의하는 모습. [중앙포토]

민주화 이후 미군 범죄가 반미 부채질
92년 동두천 미군클럽 종업원으로 일하던 윤금이씨가 미군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은 학생들을 자연스럽게 반미·통일운동으로 내몰았다. SOFA(한·미 주둔군지위협정)가 처음 발효된 67년부터 87년까지 20년간 총 4만 건에 가까운 미군범죄가 발생했고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2002년에는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사건이 일어나 중고생들까지 거리로 나오면서 촛불시위의 효시가 됐다.

분단체제가 계속되는 한 반미주의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전처럼 유행하거나 폭력성을 띨 것 같지는 않다. “이게 다 미국 때문”이라는 반미환원론으로 해석할 수 없는 다양한 사회 갈등이 존재하는 데다 국가권력을 선거와 여론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을 저항운동의 범주로 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미 연합훈련과 전쟁 중단은 이미 공개적으로 나오는 주장이다. 폭력을 수반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다만 거꾸로 비판과 이견(異見)이 차단되고 국가 권력이 국민의 통제를 벗어나려 한다면 언제라도 다시 폭력적 저항운동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자명한 일이다.


임미리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1988년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한양대 지방자치대학원에서 지방행정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대사기록연구원에서 일했다. 2013년 한국학중앙연구소 한국학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지난해 『경기동부-종북과 진보 사이, 잃어버린 우리들의 민주주의』를 펴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