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생적 좌경 지식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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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 종교인과 전직교수 2명이 남북한의 통일방안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사건은 새삼 지식인의 좌표를 되돌아보게 한다.
통일논의는 모든 국민에게 널리 확산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며 이런 전제를 놓고 생각할 때 자칫하면 이와 유사한 일이 또 저질러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논의는 우리의 통일방안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가 무엇이며 북한의 통일방안은 왜 허구성을 띤 것인지 먼저 철저히 이해하는 것이 선결 요건이다.
그 기준은 한민족의 일원으로 한반도에 발붙이고 살아야하는 현실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일탈해서는 통일논의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데 뿌리를 두어야 한다.
치안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들은 초·중·고 교사 9명을 모아놓고 『한국보다는 북한에 정통성이 있다』『6.25는 민족의 독립·통일을 위한 전쟁이지 침략이 아니다』『통일 후 우리 나라의 체제는 사회주의 체제가 돼야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돼있다.
우선 이들의 「좌경」이 간첩행위와는 구별되는 「자생적」이라는 것이 우리를 새삼 놀라게 한다.
치안당국은 이들의 언동이 일단 통일논의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며 일종의 좌경의식화 교육의 일환으로 판단하고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사건의 성격규명에 앞서 강조돼야할 점은 바로 남북한의 통일방안에 대한 진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우리의 통일방안, 더 좁혀 82년1월 전두환 대통령이 제의한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은 분단의 현실을 직시하고 통일의 전 단계로 남북한의 평화구조 정착을 기본 발상으로 하고 있다.
이 같은 기본 발상은 역대정권 어떤 통일방안에도 기본 구조로 돼 있다. 이 발상은 30여 년의 분단, 이념체제의 극단적 대립은 결코 하루아침에 통일을 이룩할 수 없다는 통절한 현실인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발상은 또 하루아침에 통일을 이루는 길은 전쟁밖에 없으며 민족상잔의 비극은 결코 되풀이되면 안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우리의 통일방안이 보는 이에 따라선 분단 지향적인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르나 통일에 대한 단계적 접근일 뿐 결코 분단지향이 아님은 민족의 양심이 증언하고 있다.
반면 북한의 통일방안은 항상 「일거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대 민족회의나 고려연방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통일방안의 진정한 의도는 그들이 내세우는 전제 조건에서 드러난다.
그들의 전제 조건은 ①남한의 정치체제를 「용공체제」로 바꾸고 ②반공체제가 폐지돼야하며 ③주한미군의 철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사회체제와 국방체제의 와해가 그들의 진정한 목표며, 다음 단계는 「남조선 해방혁명의 길」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다.
더 한층 주목할 일은 우리의 통일방안이 북한이 주장하는 통일방안까지 논의할 여지를 남기고 있는데도 그들이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통일방안이건 대화라는 수단을 통해 이룩되는 것인데도 그들이 대화를 거부하는데서 그들의 진지성은 의심하고도 남음이 있다.
일부 지식인들이 감상적이고 때로는 환상적인 미몽에 사로잡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개인의 불행일 뿐 아니라 그 사회의 불행도 된다.
흔히 한 사회가 고도산업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선 이런 경향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일본의 과격 적군파와 같은 경우가 그런 예의 하나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스스로 돌아보고 우리가 가야할 바를 직시해야 할 시점에 있다.
이 순간 방황하고 미몽에 잠겨 있으면 우리는 다시는 발전의 진 운을 잡을 수 없다. 지식인의 사명과 책무도 그런 관점에서 경건하고 엄숙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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