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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돌 맞은 '고도를 기다리며'

중앙일보

입력

텅 빈 무대 위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나무 곁에서 두 부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끝도 없는 얘기를 지껄여댄다. 이들은 ‘고도’라는 정체불명의 인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 앞에 괴상한 주인과 하인이 나타난다. 포조와 럭키다. 포조는 럭키를 개처럼 끌고 다니며 온갖 심부름을 시킨다. 네 사람 사이의 대화는 시종일관 얼토당토않다. 포조와 럭키가 퇴장하면 불현듯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씨는 오늘 밤에 못 오지만 내일 올 예정”이라고 말한다.

한국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 1막 줄거리다. 기승전결식 맥락이 없다.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한 동작과 대화가 쉼없이 이어질 뿐이다. 2막도 1막과 거의 똑같은 내용이 되풀이된다. 극이 끝날 무렵 소년이 다시 나타나 “고도씨는 오늘 밤에 못 오지만 내일 올 예정”이라고 말한다.

1969년 12월 국내 초연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12일부터 5월 17일까지 서울 서교동 산울림소극장에서 ‘초연 45돌 기념 공연’을 한다. 연출가 임영웅(79)의 연출 데뷔 60주년, 산울림소극장 개관 30주년 기념을 겸한 자리다. 지난 45년 동안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2000여 차례 무대에 올라 50여만 명의 관객을 만났다. 일본ㆍ아일랜드 등 4개국 5개 도시에서 해외 공연도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이토록 허탈한 이야기가 반세기 가까이 관객들을 매료시킨 이유는 뭘까. 그 첫째 원동력은 원작 자체가 보고 또 봐도 새로울 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일랜드 작가 사무엘 베케트(1906∼89)가 52년 발표한 희곡이다. 53년 프랑스 파리의 바빌론 소극장에서 초연됐고, 이후 수십 개 언어로 번역돼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연되고 있다.

3일 산울림소극장 연습실에서 만난 연출자 임영웅은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해 “현대인의 모습을 선구자적으로 잘 그린 작품”이라고 평하며 “할 때마다 등장인물에 대한 해석이 깊어지고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그가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 연구에서 밝힌 작품 해설은 이렇다. “세상이 거지 같고 개떡 같으니까 아무렇게나 산다. 하지만 포기하고 사는 건 아니다. 고도가 뭔지는 몰라도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절망의 나락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할 수 있는 게 바보같은 짓밖에 없으니까 장난치듯, 지랄하듯, 온갖 작태를 펼친다. 보는 사람들은 ‘바보 같은 자식들, 왜 저렇게 사냐’고 하면서 웃다가 연극이 끝날 때쯤 왠지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딴 사람에게 나도 저렇게 보이나’란 생각이 들면서 ‘아, 그럼 나는 이게 잘 살고 있는 건가’ 생각하게 된다.”

결국 작품을 통해 무엇을 얻을지는 전적으로 관객의 생각에 달렸다. 작가 베케트 역시 “보는 동안 즐겁게 웃으면 된다. 극장에서 실컷 웃고난 뒤, 집에 돌아가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관객들의 자유”라고 밝힌 바 있다.

세상이 점점 정서적으로 황폐해져 뭔가를 갈구하는 심정이 간절해질수록 ‘고도를 기다리며’의 가치는 높아진다. 연극평론가 김미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80년대보다 요즘 더 공감이 잘 되는 작품이다. 학생 관람을 시켜보면 젊은 학생들이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출연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도 ‘고도를 기다리며’의 생명력에 한몫했다. 그동안 김무생ㆍ전무송ㆍ정동환ㆍ주호성ㆍ송영창ㆍ정재진ㆍ안석환ㆍ한명구ㆍ김명국 등 40명의 연기파 배우가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에 섰다. 이 중 13명이 이번 기념 공연에 출연한다. 20년 만에 블라디미르 역을 맡은 송영창은 “느닷없이 나오는 대사가 많아 배우들에게 힘든 작품이지만, 연출가가 시선과 동선 하나하나, 대사 간격 등 모든 것을 아주 정확하게 계산해 지시하기 때문에 그에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한 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임영웅식 연출 스타일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세계 연극계에서 인정받게 만들었다. 일본 도쿄 공연을 했던 99년에는 아사히 신문 선정 '베스트 5 연극'에 최다 득표로 선정되기도 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운도 좋은 작품이다. 69년 12월 한국 초연 직전 작가 베케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단박에 화제작으로 부상했다. 공연표는 매진됐고 연장공연도 했다. 임영웅 연출가는 “이 작품이 히트를 치면서 70년 극단 산울림을 만들었고, 85년엔 소극장도 개관할 수 있었다”며 “꾸준히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할 수 있었다는 게 내 인생의 행운”이라고 말했다. 또 기다리는 존재의 이름인 ‘고도(Godot)’가 한자어 ‘고도(高度)’와 발음이 같다는 점도 작품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뭔가 높은 이상향 등을 뜻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서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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