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문화cafe] 춤, 저 관능의 언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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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은 재미있어야 하나. 뮤지컬은 감동을 줘야 하나.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막이 오른 밥 포시의 뮤지컬 '피핀(Pippin)'은 이런 고정관념에 강펀치를 날리는 문제작이다.

줄거리의 대강은 이렇다. 9세기께 프랑크 왕국 찰스 대제의 아들 피핀이 있었다. 현실에서 모든 걸 만끽할 수 있음에도 그는 '인생의 참 의미, 행복' 등 거창한 문제에 집착한다. 그러곤 그걸 찾는다며 길을 떠난다. 전쟁의 살육 현장을 겪고 섹스와 마약, 동성애에 빠져본다. 혁명의 격렬함과 존속살인의 극단적 상황을 거쳐 그가 최후에 깨달은 건 평범한 일상에 바로 행복이 있다는 사실. 지극히 교훈적이고 어찌 보면 불교적 색채마저 느끼게 하는, 우리로선 뻔하디 뻔한 주제다.

그러나 이를 풀어내는 형식은 놀랍다. 우선 리딩 플레이어(Leading Player)란 게 있다. 그는 주인공 피핀보다 더 자주 무대에 등장하며 뮤지컬 전체를 이끌어가는 사회자 역할을 맡는다. 마치 지금 공연 중인 것이 쇼일 뿐이라는 듯 그는 툭하면 극 속에 끼어든다. 그래서 관객은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한다. 브레히트의 '낯설기 하기'다.

캐릭터도 차별적이다. 각 인물은 비극적.극단적 상황에 처해서도 우스꽝스럽고 과장되게 행동한다. 그래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주인공 피핀은 윗옷을 벗어도 요즘 흔하디 흔한 몸짱이 아닌 그저 평범한 몸이다. 카리스마가 넘치지도 않고, 고뇌에 찬 지식인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판타지를 선사하지 않는 것이다.

'시카고' '카바레'를 만든 세계적인 안무가 밥 포시가 이런 방식을 채택한 것은 권위에 대한 조롱이다. 어떤 틀에 짜여 감동을 선사하는 내러티브를 해체하면서 그는 기존 질서에 대해 나름대로 균열을 일으키고자 한다.

여기서 멈췄다면 이 작품이 토니상 5개 부문 수상에 빛나는 걸작으로 탈바꿈하진 못했을 것이다. 까다로운 형식미를 밥 포시는 특유의 관능적인 춤사위로 포장한다. 자칫 지루해 할지 모르는 관객을 위해 코믹한 인물과 철저히 계산된 애드리브(즉흥 대사)를 삽입하는 배려심도 보인다. 대중성과의 조우는 결국 이 작품을 뮤지컬 초보자나 매니어 누구든지 즐길 수 있게끔 한다. 단 하나, 계산된 애드리브를 넘어선 오버 연기는 옥에 티처럼 보였다. 내년 1월 15일까지. 02-501-7888.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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