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선정 논란 친일 인명사전 … 서울 중·고교, 살지 말지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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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서울 도봉구 A고교 교장은 최근 한 학부모 단체가 보낸 공문을 받고 고민에 빠졌다. 교육과 학교를 위한 학부모연합(교학연)이란 단체가 보낸 내용증명서 때문이다. 거기엔 “친일 인명사전을 학교 도서관에 비치하거나 학습 참고자료로 활용한다면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보고 고발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사전은 2009년 진보 성향의 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것이다.

 이 학교 교장은 “친일 인명사전 구입비가 시교육청 예산에 편성돼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며 “항의 공문을 받은 상황에서 시교육청에 구입비를 지원해 달라고 하는 게 꺼려진다”고 말했다. 서울시내에서 같은 공문을 받은 학교 수는 100곳이다. 이순이 교학연 대표는 “친일 인명사전은 이념 편향적인 자료”라며 “조만간 이들 학교에 2차 경고문을 내려보내고 자료 구입비 지원을 요청한 학교가 어딘지 밝히기 위해 서울시교육청에 정보공개 청구를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내 모든 중·고교 도서관 등에 친일 인명사전을 비치하는 예산(1억7500만원)이 올해 서울시교육청 예산에 책정되면서 새 학기를 맞아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 예산은 당초 시교육청이 편성한 게 아니었다. 지난해 12월 서울시의회 김문수(새정치민주연합) 교육위원장 등이 주도해 시교육청 예산안에 ‘친일청산교육활동지원 사업비’라는 항목을 끼워 넣은 것이다.

 사전 구입비가 포함된 예산안이 올해 시행되면서 사전을 구입하고 싶은 학교는 시교육청에 지원 신청만 하면 돈을 타낼 수 있다. 종로구 B중학교 교장은 “이 사전이 실제로 이념 편향성을 보이는지 여부를 일일이 따져볼 수는 없지만 학부모 단체의 반발을 무시할 수는 없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학교에 예산을 지원하려 했던 시교육청도 뒤늦게 발을 빼고 있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각 학교가 학기 초에 교사·학부모로 구성된 도서선정위원회를 열어 당해연도 도서를 구입하는 게 원칙이어서 교육청이 사전 구입을 요구할 순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문수 위원장은 “아직도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위안부 문제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며 “좌우를 떠나 자라나는 학생들의 올바른 역사의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라고 말했다.

신진 기자

◆친일 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1월 8일 발간한 3권(2800쪽)짜리 인명사전. 시중 서점에서 30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일제 식민 통치에 협력했다고 판단되는 정치·종교·언론계 4300여 명의 인적 사항과 행적이 정리돼 있다. 편찬 당시 독립유공자도 포함되는 등 인물 선정 기준이 적절치 않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지난해 6·4 지방선거 때 조희연 교육감의 선거본부 개소식 축하 영상에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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