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눈치 없이 뒹굴어도 괜찮아 … 이런 카페놀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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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만화 카페 ‘즐거운 작당’의 명당 자리. 만화책이 빽빽이 꽂힌 서가 아래 움푹 들어간 소굴 같은 공간에서 뒹굴며 만화책을 읽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주문할 수 있어 하루 종일 머무는 것이 가능하다. [김경빈 기자]

그런 날이 있다.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어지는. 요즘 말로 ‘잉여 돋고’ 싶은 날. 다행히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오래 머물러도 괜찮은 카페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시끄러운 음악, 불편한 의자로 회전율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 카페의 기본적인 생존법칙을 역행해 오히려 가능한 한 오래 손님을 잡아 두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 곳들이다. 손님의 발목을 잡는 방식도 다양하다. 만화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게 하고, 공연을 보거나 작품을 관람하게 한다. 사랑방 손님이라도 된 양 오래 머물러도 좋은 문화살롱 카페를 소개한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만화 카페 ‘즐거운 작당’에 입장하려면 일단 신발부터 벗어야 한다. 슬리퍼를 갈아 신고 이용 카드를 받은 뒤 자신만의 은신처를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가장 인기 있는 자리는 만화책이 꽂혀 있는 서가 아래 위치한 소굴처럼 움푹 들어간 공간. 2~3명이 이용하면 꽉 차는 좁은 방으로 누워서 뒹굴며 만화책을 즐길 수 있다. 만화책을 보는 비용은 권수와 상관없이 시간당 3000원, 종일 보는 데 1만5000원이다. 대신 음료와 과자, 간단한 식사 가격은 저렴한 편이다. 카페 주인인 김민정(44)씨는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2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이곳을 열었다. 더 늦기 전에 오랫동안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자는 결심을 한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 좋아했던 만화방에서 아이디어를 찾았다. 자욱한 담배 냄새와 짬뽕 국물이 튄 더러운 소파, ‘추리닝’ 차림의 아저씨들이 먼저 떠오르는 만화방 대신 카페 같은 현대적이고 쾌적한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종이매체가 줄 수 있는 즐거움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지만 저와 같은 취미를 가진 소수의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공간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여자친구와 함께 이곳을 찾은 대학생 이석현(20)씨는 “어린 시절 만화대여점에서 만화책을 빌려 읽거나 만화방에서 만화를 읽곤 했는데 최근에는 그런 공간들을 찾아볼 수 없게 돼 아쉬웠다”며 “추억의 장소가 진화된 형태로 나타난 것 같아 반갑다”고 했다.

 마포구 창전동에 위치한 북 카페인 ‘오래 있어도 괜찮아’는 이름부터 손님이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이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곳 주인인 김방울(32)씨는 “학생 시절, 카페에 가서 차 한 잔 시켜 놓고 몇 시간씩 앉아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면 눈치가 보였다. 눈치 보지 않고 있고 싶은 만큼 있을 수 있는 카페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5년 전 당시로선 드물게 카페 한쪽에 좌식 공간을 꾸며 기대거나 누워서 책을 볼 수 있게 만든 이유다. 다른 북 카페와 다른 차별화 포인트는 손편지 서비스다. 커피와 편지지를 산 뒤 편지를 써서 카운터에 제출하면 직원이 편지를 받는 사람에게 문자메시지를 통해 편지가 도착했음을 알린다. 연락을 받은 사람이 카페를 방문하면 손편지와 함께 커피 한 잔을 전해 준다. 커피는 ‘허형만의 압구정 커피집’에서 공수한 원두만을 사용한다.

카페 ‘오래 있어도 괜찮아’에서 제공하는 손편지 서비스. 커피와 편지지를 구입해 손편지를 쓰면 카페 직원이 수신인에게 연락해 커피와 편지를 전달한다.

 읽을거리가 아닌 들을거리로 손님의 발길을 붙잡는 곳도 있다. 서교동에서 ‘비터스윗사운드’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김현진씨는 본인이 동명 밴드의 작사·작곡가이자 보컬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밴드음악을 하는 이들이 길거리 공연을 하면서 뜨내기 관람객을 상대하는 것을 보고 고정적인 관객을 모아 주기 위해 카페의 한쪽 공간을 무대로 만들었다. 김씨는 “이색적인 문화공간을 찾는 손님들의 수요도 있고, 관객과 직접 소통하고 싶어 하는 아티스트도 많기 때문에 이들을 연결시켜 주자는 취지에서 기획했다”고 말했다. 이곳 단골인 김혜진(32)씨는 “대부분의 라이브 바는 술을 주문해야 하는데 이곳은 커피만 주문해도 되고 입장료를 따로 받지 않아 경제적으로 부담 없이 공연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이곳은 특히 봄이나 가을이면 가게 테라스 문을 열고 공연을 한다.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까지 객석이 확장되는 셈이다.

  가구·인테리어 전문점이 모여 있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지복득 다방’은 미술작품을 관람하면서 커피나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지복득 마루’라는 마루회사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1층은 카페, 2층은 갤러리로 운영된다. 주로 젊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5~6개월 단위로 전시한다. 관람비는 무료다. 이곳 기획팀장인 손현정씨는 “고급 가구나 인테리어 가게들이 많은 동네다 보니 일반인들이 아예 접근할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있다”며 “편안하게 차도 마시고 작품도 감상하면서 주거문화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자는 생각으로 카페 형태의 가게를 내게 됐다”고 말했다. 이곳은 인근의 인테리어업자나 동종 업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회의실이자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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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차나 음료를 마시면서 문화나 여가생활까지 즐길 수 있는 장소가 인기를 끄는 데는 얇아진 지갑 사정도 한몫한다. 이런 곳들에선 저렴한 비용으로 문화생활을 즐기면서 동시에 먹고 마시는 데 드는 비용도 줄일 수 있다. 남자친구와 만화 카페를 찾은 양소희(25)씨는 “영화 보고 밥 먹고 차 마시는 데이트는 뻔하기도 하고 경제적인 면에서의 부담도 크다”며 “이색적인 체험을 하면서 비용도 아낄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디지털 피로감으로 인한 반작용으로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가 짙어지는 측면도 있다. 만화와 책, 음악, 미술작품 감상 등을 휴대전화나 태블릿PC 등 개인화된 기기로 향유할 수 있는 시대에 오히려 오프라인 공간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는 “경쟁이 치열하면 할수록 본인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데서 오는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며 “혼자라는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에 편안하고 자유스러우면서도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글=김경진 기자 kjink@joongang.co.kr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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