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했나|학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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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다사 다난했던 83년도 이제 저문다. 한햇동안 문화계에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들. 무엇을 했고 무엇을 얻으려고 발버둥쳤으며 그 성과는 어떠했는가. 우리 문화계 각 분야에 걸쳐 한해의 업적을 평가해본다.
이제 우리 학계도 어느 특정한 학문연구 경향이 전체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만큼 다양한 방향으로 성숙돼가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흐름속에서도 올해의 가장 두드러진 학술현상은 학문연구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왕성하게 추구돼왔다는 점을 들수 있다. 이는 아직도 문화식민지적 성격을 완전히 벗지못한 우리학계가 질적 도약을 꾀하고자하는 자구적 몸부림이기도하다.
먼저 한국고유의 사회문화적 환경과 상황에 보다 적합한 발전양식을 모색키위한「자생적 발전」연구가 관심을 모았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와 한국사회과학연구협의회가 함께 펼친 이연구는 한국사회에 관련된여러 학문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이연구는 특히 지식과 과학기술의 무절제한 도입으로 우리 고유의 문화생활의 질과 주체성이 근본적으로 파괴될 위기에 봉착했음을 인식한데서 출발했다.
사회학계는 현재 교육중인 사회학 이론이나 방법론이 한국사회를 얼마나 설명할 수있느냐의 문제에 논의의 초점을 모은바 있다.「한국사회와 사회학이론」을 주제로 모였던 사회학대회에서 학자들은 외국으로부터의 무분별한 모방과 도입을 벗어나 한국사회를 분석할수 있는 틀의 형성이 긴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경제학자들이 모여「한국경제학」을 모색한점도 올해 학문적 소득의 하나였다. 원론다운 원론 하나 없이 기존 경제이론을 풀어 재구성한 경제입문서만 맴도는 실정에서 한국의 경제학을 정립코자하는 노력은 주목받을 일이다. 학자들은 앞으로 서양 경제이론의 재점검과 수용문제, 토착화와 정립에 이르는 과제들을 다뤄나갈 것이다.
올해로 창립30주년을 맞았던 한국교육학회는 일제의 식민지교육. 해방후 미국식교육의 모방에서의 탈피를 당면과제로 보고 교육학의 자주화를 논의한 바 있다. 행동주의적 입장에서 교육학을 과학화하려는 학자들과 역사적·철학적 연구를 강화하면서 교육학 연구의 주체화를 추구하려는 학자들간의 대립속에서 어떻게 한국교육학의 이론 체계가 정립될지 주목된다.
역사학계에선 한국사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 강화됐다. 올해는 유난히 한국고대사에 대한 학술활동이 왕성했던 한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봄가을 두차례에 걸쳐 민족의기원과 고조선문제를 중심으로 고대사에 대한 학술모임을 가진바 있고, 백제사연구에서도 충남대 백제연구소와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각각 한차례씩 대규모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한국고고학연구회도 지난11월 전국대회를 통해「원삼국시대」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한 바 있다.
중앙정부중심의 연구에서 탈피, 지방사에 대한 관심이 확충된 점도 특기할 경향중의 하나였다. 지방마다 자발적인 향토사연구회를 결성, 활기찬활동을 펴고 있다. 국편은 지방사 사료수집을 위해 전국에 l백20명의「지방사료조사위원」을 위촉한바 있고, 한국교육학회 교육사연구회는 종래의 중앙교육사 중심에서 탈피, 지방에 산재한 향토교육을 종합연구, 한국교육사의 내용을 보완키 위한 연구활동을 펴기도 했다.
이제 학문연구의 주체성과 자주성은 우리 학계에서 모든 학문적 활동의 가치를 검증하는 가늠자로서 등장하고있다는 느낌이다. 우리 학문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이러한 학문적 노력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역기능에 대한 우려 또한 없지 않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정도로 억지스런 이론이나 정치·문화현실에 무분별하게 일으키는 복고주의적 경향, 팽배하는 영웅주의와 국가주의적 풍조같은 것들이다.
어느 학자는 우리의 주체성문제를 대외적 측면에서만 추구할것이 아니라 민족사발전의 내재적 과제와 연관함으로써 무분별한 배타성을 청산하고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설정할때라고 지적한바있다.
「주체성 바람」의 역기능을 해소하려면 무엇보다도 연구내용의 자유로운 발표분위기조성, 체면불구자가 이기는 황폐한 논쟁풍토가 아닌 건전한 비판토양, 학자스스로 담쌓는 연구를 넘어 학문적 용기를 확립하는게 선결 과제지만, 요컨대 학문의 과학성이란 토대가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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