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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함 속의 대중성 K-패션의 마력 빛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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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호 16면

2월 13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링컨센터에서 열린 컨셉코리아 패션쇼. 이른 오전 시간임에도 좌석 수보다 많은 이들이 현장을 찾았다.

‘국가 대표’라는 말은 문화·예술계에 그닥 어울리지 않는다. 소설가나 화가 중에 ‘국가 대표’가 없는 건 개인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난들 그것이 국가의 정체성이나 이미지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데 패션계에는 국가를 앞세운 행사가 있다. ‘컨셉코리아’ 프로젝트다. 2010년부터 문화관광체육부(장관 김종덕)와 한국콘텐츠진흥원(원장 송성각, 이하 콘진원)이 주관하는 이 사업은 미국 진출을 꾀하는 국내 패션디자이너들을 선정, 매년 2월과 9월 뉴욕패션위크 기간 중 패션쇼를 지원한다. 더불어 현지 비즈니스 플랫폼 구축도 돕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캐치프레이즈는 하나. 컨셉코리아라는 이름 그대로 “한국 패션이란 이런 것이다”를 표방하는 것이다.

한국 디자이너 3인, 뉴욕패션위크서 합동 패션쇼

이번 시즌 11번째를 맞이한 행사에는 세 명의 ‘국가 대표’가 출전했다. 고태용(비욘드클로젯)·이승희(르이)·이주영(레쥬렉션) 디자이너다. 서울패션위크에서는 단독 무대를 펼치던 이들이 뉴욕에서만큼은 ‘단체전’을 치르듯 합동 패션쇼를 선보였다. 서로 다른 색깔의 디자이너들이 보여주는 한국 패션의 특징은 무엇일까. 패션 한류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지난달 열린 뉴욕패션위크 현장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쇼가 끝난 뒤 기념사진. 왼쪽부터 고태용 디자이너, 톱 모델 알렉산더 제이, 이주영 디자이너, 펀 맬리사 컨셉코리아 글로벌 자문위원장, 이승희 디자이너.

오전 9시, 한파에도 스탠딩석까지 만원
13일 오전 8시(현지 시간) 뉴욕 맨해튼 링컨센터의 파빌리온. 백스테이지는 유난히 분주했다. 3명의 디자이너가 함께 무대를 준비하다보니 모델만 해도 보통 쇼에 두 배에 달하는 45명. 거기에 각 디자이너별 스태프들까지 모이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한국콘텐츠진흥원 김영덕 음악패션산업팀장은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얼마나 쇼를 보러 올지 모르겠네요. 날씨도 영하 10도가 넘고….”

하지만 기우였다. 마지막 리허설이 끝나가던 쇼 시작 20분 전부터 초대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버그도프 굿맨, 오프닝 세리모니, 바니스 뉴욕 등 주요 백화점 바이어는 물론 보그, 엘르, 뉴욕타임스 T 매거진 등의 기자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면서 350석도 모자라 서서 보는 이들이 100여 명에 달했다. 그야말로 추위를 녹이는 열기였다.

짧은 동영상과 함께 드디어 쇼가 시작됐다. ‘화합의 완벽한 삼각 구도(Three Perfections of Harmony)’라는 주제만큼이나 쇼는 잘 짜여진 각본처럼 전개됐다. 스타트를 끊은 고태용의 비욘드클로젯은 심박수가 올라가듯 비트를 점점 빨리하는 음악으로 한순간 주목도를 높였다. 1990년대 한국의 ‘오렌지족’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은 남성복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원색과 오버사이즈 외투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클래식한 체크 바지와 코트에 알록달록 작은 자수를 놓거나, 기본형 코트 안감이나 바지에 꽃무늬 옷감을 짝짓는 위트 역시 남달랐다.

그 뒤를 따른 이승희의 르이는 들뜬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차분한 현악 선율에 어울리는 절제된 의상들이 등장했다. ‘순수한 앙상블’을 모티브로 회색과 베이지 등의 중성색에 군더더기 없는 실루엣의 옷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칼로 벤 듯 단정하지만 디테일의 변화로 한 끗을 달리했다. 코트 목덜미에 리본 묶기를 하거나 무스탕과 캐시미어를 안팎으로 겹친 베스트가 그런 예였다.

마지막으로 나선 이주영의 레쥬렉션 무대가 다시 분위기를 끌어올리며 쇼의 완성도를 높였다. 70~80년대 ‘네오펑크’를 테마로 한 컬렉션은 록그룹 스완즈의 음악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씨 특유의 검정을 주요 컬러로 내세우면서 다양한 소재로 지루함을 탈피한 점이 특징이었다. 자카드 꽃무늬 원단에 한국 전통 비단을 짝지은 수트, 염소털 스웨트셔츠, 가죽처럼 보이지만 실제 플리스(양에서 채취한 촉감이 부드럽고 솜털이 있는 천)를 사용한 금색 점퍼는 가까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컨셉코리아 2015 FW에 참가한 디자이너들의 컬렉션. 윗 줄은 비욘드클로젯(고태용), 가운데 줄은 르이(이승희), 아래 줄은 레쥬렉션(이주영).

이벤트보다 옷 자체에 집중하는 패션쇼로 변화
이번 무대는 이전과 큰 차이를 뒀다. 과거 패션과 문화 콘텐트를 결합하는 ‘이벤트’ 성격이 강했던 것에 비하면 옷 자체에 무게중심을 실었다. 지난 시즌만 해도 블락비·드렁큰타이거 등 국내 가수들과의 콜라보레이션 무대를, 2013년 봄·여름 시즌에는 한국을 상징하는 전통 색상인 오방색을 주제로 영상물과 공연을 곁들이는 행사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국 문화 요소를 패션에 녹여 선보였다. 실제 비욘드클로젯이 풀어낸 오렌지족은 외국인에게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지만 고씨의 생각은 달랐다. “그 자체가 한국 대중문화의 스토리텔링도 되지만 크게 보면 럭셔리 프레피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거죠.” 이주영의 전통 비단 역시 패션쇼 안에서 한국 복식 문화를 알리는 시도로 호평을 받았다.

실제 이날 쇼가 끝난 뒤 백스테이지에서 디자이너들과 다시 대화를 나누기는 쉽지 않았다. 현지 언론의 인터뷰가 쉴틈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옆에서 펀 맬리스 전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 이사가 이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93년 뉴욕패션위크의 창시자로 알려진 그는 컨셉코리아의 글로벌 자문위원장을 맡아 ‘한국 패션 전도사’를 자임하고 있는 인물. 한국 패션의 특징을 그는 간단히 정리했다. “대담하고 기발하죠. 그러면서도 신기한 건 참 대중적이고 동시대적이에요.” 특히 남성복의 다양성에 점수를 줬다. 약점을 물었을 때는 주저하며 ‘빈약한 패션 인맥’을 꼽았다.

그런 생각에서일까. 이번 시즌 그는 직접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애프터파티를 열었다. 외국에서는 누가 파티의 호스트가 되느냐에 따라 손님의 구성과 행사 중요도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결정이었다.13일 저녁 스탠다드호텔에서 열린 파티에는 200여 명의 현지 패션 관계자들이 다녀갔다.

행사 끝나자마자 계약·상담 줄이어
행사가 끝나자마자 디자이너의 세일즈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태용은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이주영은 쇼 다음날 바로 주문이 들어왔다. LA의 처치, 뉴욕 소호의 언타이틀드 등 평소 입점을 가장 꿈꾸던 매장이었다. 이승희의 경우 미국 대형 편집숍인 인터믹스는 물론 이미 8개 매장과 계약을 했다.

이처럼 희소식이 전해졌지만 정작 디자이너들은 담담했다. 컨셉코리아의 성과가 바로 드러나는 ‘숫자’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파리 박람회 ‘트라노이’에 진출했다 뉴욕으로 노선을 바꾼 이승희는 “컨셉코리아를 발판으로 뉴욕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나에게 맞다는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주영은 가장 큰 성과가 꼭 매출만은 아니라도 했다. “패션은 사실 인맥으로 이뤄지는 사업이에요. 그런 점에서 좋은 네트워킹을 갖게 된 게 큰 결실이죠.” 그는 뉴욕 시장 자체가 신진 디자이너가 크려면 최소 3년은 ‘간을 보는’ 곳이라고 했다. 패션위크 기간 동안 세계에서 25만명이 찾아오고, 경제효과만 8억8700만달러(약 1조원)에 달하는 거대 시장인만큼 당장 숫자로 성과를 말할 수 없다는 얘기. 공교롭게도 그 3년은 컨셉코리아의 최대 지원 한도와 똑같은 기간이다.

한편 컨셉코리아를 거쳐간 국내 디자이너들은 뉴욕에서 지속적으로 단독쇼를 펼치고 있다. 이상봉·최범석·박춘무·손정완 디자이너가 그들. 이상봉 디자이너의 경우 파리 컬렉션에서 컨셉코리아 이후 뉴욕으로 무대를 옮기고 현지에 플래그십 매장까지 열 정도로 큰 변화를 겪었다. 국내서 탄탄한 입지를 갖춘 손정완 디자이너 역시 뉴욕에서 역시 그만의 여성스럽고 로맨틱한 디자인으로 고정 팬을 확보해 가고 있다. 14일 링컨센터에서 열린 쇼에는 미국의 사진작가 고든 파크스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50년대 고전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듯한 극적인 의상들을 선보였다. 그의 뮤즈라 알려진 배우 켈리루더포드와 켈리 벤시몽 등이 맨앞줄을 빛냈고, WWD 등 대표 패션매체가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뉴욕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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