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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y/리빙] '미운 오리' 가장 가장자리로 내몰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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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아내는 나보다 아이 우선 시험 때면 알아서 나가 있으래 녀석은 힐끔 보고 시큰둥 말 다했지, 기러기보다 외로워" - 미운 오리족 아빠

일러스트레이션 강일구

박씨만의 얘기가 아니다. 한집에 살기는 하되 이런저런 이유로 가족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되는 아빠, 일명 '미운 오리족(族)'이 늘고 있다. 식구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기는커녕 있어도 없는 것 같은 투명인간 취급을 받거나, 더 심한 경우 노골적으로 따돌리는 가족들 탓에 집에 있으면 좌불안석인 경우가 많다. 생활비.학비 벌어다 주느라 허리가 휘는 건 기러기들과 다르지 않다. 다만 기러기 가족들은 떨어져 사는 아빠를 그리워하기라도 하는 반면 미운 오리네 오리들은 미운 오리(아빠)를 거치적거리는 존재로 바라보며 자꾸만 밖으로 내몬다는 차이가 있다.

고등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를 둔 주부 임모(서울 개포동)씨는 "시험 때면 무조건 집에서 남편을 내보낸다"고 말한다. "아빠가 집에 있으면 자꾸 TV를 켜거나 시끄럽게 해서 아이가 공부에 집중을 못 하기 때문"이란다. 작은 아이와 함께 내보내며 "알아서 밥 해결하고 어두워지면 들어오라"고 주문하면 남편은 군말 없이 집을 나선다.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나중에 "같은 처지의 아빠들을 많이 봤다"는 말을 들으면 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긴다고.

그래도 임씨네 가족은 나은 편이다. 평소 대화가 없어 서로 속내는커녕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모르는 집도 많다.

학원 가느라 밤 늦게 들어오는 딸아이 시간에 맞춰 운동하러 다니는 주부 이모(서울 개포동)씨. 어느 날 집에 들어와 보니 사색이 된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모처럼 일찍 들어와 보니 집에 아무도 없고 휴대전화도 안 받아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것. 아이는 학원 수업 중이고 부인은 운동 중인 걸 몰랐단다.

이씨는 "아이 학원 시간 바뀐 지 한 달이 넘도록 모르고 있는 남편이 야속했지만 저녁 굶고 기다리는 모습이 처량해 스케줄을 적어 줬다"며 "달랑 세 식구인데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는 걸 보고 나도 남편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이가 커갈수록 아빠는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는 게 보통이다. 대학입시가 수험생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닌 한 집안의 중대사가 되면서 모든 생활의 중심이 아이의 공부에 맞춰지기 때문이다. 공부를 챙겨주는 엄마가 아이와의 유대관계를 지속적으로 넓혀가는 동안 아빠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와 갈등만 일으키며 갈수록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

대다수 엄마는 "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고 챙겨야 할 밤 모임도 많은 한국 사회 특성상 아빠도 피해자"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노력하지 않는 아빠도 문제"라고 말한다. 어쩌다 일찍 들어와도 아이의 학습진도를 모르니 공부를 가르쳐줄 수도 없고, 그렇다 보니 대화에 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빠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오죽하면 회사원 정모(42)씨는 "식구들과 한마디도 안 하고 지나가는 날도 많다"며 "어떨 땐 식구들 눈에 내가 아예 안 보이는 것 같다"고 털어놓겠는가.

집에서 '왕따'당하는 아빠의 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남성을 위한 상담기관인 남성의 전화에 따르면 40, 50대 가장들이 털어놓은 고민 가운데 가정 내 소외감이 실직이나 부인의 외도만큼이나 많다.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부권 찾기 모임(National Fatherhood Initiative)의 롤런드 워런 회장은 최근 오프라 윈프리쇼에 출연해 "결혼이나 출생으로 이어진 가족관계가 자연적으로 친밀감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적극적으로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워런 회장은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그중 하나가 사진첩을 만들라는 것. 장기간 출장으로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때 서로 카메라(폰카)로 사진을 찍어 일상을 공유하라는 것이다. 출장이 아니더라도 서로 일과가 달라 평일에 단 한마디도 할 시간 없는 집이라면 해볼 만한 방법이다. 또 하나는 아이와 직접 대화하라는 것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또는 귀찮다는 이유로 아내를 통하는 대신, 할 말이 있으면 직접 말하라는 것. 짧은 시간이라도 훨씬 효과적이고 친밀감 형성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안혜리 기자< hye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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