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왕실모독법, 서거 100년 지난 왕에 대해 말하는 것도 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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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태국 군부가 정적(政敵)에 대한 탄압 강도를 높이고 있다. 25일 현지 언론에 따르면 국가반부패위원회(NACC)는 아피싯 웨차치와 전 총리와 수텝 터억수반 전 부총리가 2010년 방콕 시위 때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 큰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며 이들이 권력 남용 및 배임 행위를 했다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두 지도자에 대한 의회의 탄핵이 가결되면 이들은 5년 동안 정치 활동이 금지된다. 외신들은 NACC의 결정은 군부의 의중을 반영한 것으로 야권 탄압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태국 검찰은 앞서 지난 19일 쌀 수매 정책과 관련한 부정부패 및 업무 방기 혐의로 잉락 친나왓 전 총리를 기소했다. 의회가 지난달 그를 같은 혐의로 탄핵한 데 따른 조치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여동생인 잉락 전 총리는 농가 소득 보전을 위해 취임 직후인 2011년부터 지난해 초까지 시장 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쌀을 수매하는 정책을 폈다. 군부와 집권 세력은 쌀 수매 정책으로 5조원 가까운 재정 적자가 발생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탄핵으로 이미 5년간 정치 활동이 금지된 잉락 전 총리가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최고 10년 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에 대해 군부가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워 오는 10월 예정된 총선에서 친(親)탁신 세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깔렸다는 분석이 나왔다. 영국 가디언은 “잉락 전 총리에 대한 기소는 태국 국민들의 정서에 반하는 조치”라며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탁신 전 총리와의 협상 카드로 잉락 전 총리를 기소했다”고 전했다.

친 군부 성향의 사법부도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왕실 모독죄’를 활용해 비판 세력을 탄압하고 있다. 지난 23일에도 대학 연극에서 왕실을 풍자한 20대 2명에게 징역 2년6월형을 선고했다. 최고 15년 형에 처할 수 있게 하는 왕실 모독죄 법은 규정이 애매하고 처벌이 가혹해 정적 탄압에 악용되고 인권 침해 소지를 안고 있다. 10여년간 왕실 모독죄 폐지를 주장해 온 쏨킷 릇파이툰 전 탐마쌋대 교수는 “쿠데타 이후 왕실 모독죄로 한 달에 세 명 꼴로 잡혀갔다”며 “서거 100년이 지난 왕에 대해 언급했다는 이유로 처벌받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