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한일회담(72)수보전의 입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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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본측 수석대효 「구보따」(구보전)씨의 망언으로 제3차 한일회담이 결렬된 이후 4년간의 한일관계는 지난38년간 양국관계에서 가장 험악하고불편했던 시기였다.
양국관계에 이같이 엄청난 파장을 낳게한 장본인 「구보따」 씨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안경을 낀 작달막한 직업외교관이었다.
직업외교관으로서는 일본에서 가장높이 올라갈수 있는 외무차관 바로 차하급의 참여까지 오른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상대를 둔, 그것도 과거의 피식민관계를 청산하려는 상대방과의 외교적 협상에서 외교관의 언행으로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될 발언을 했다.
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성사시켰던「시이나」 (추명) 외상의 회고에 따르면 「구보따」 씨는 그 자신의 연쇄적 망언을 낳게한 최초의 발언은 순전히 조크로했다고 후술했다는 것이다.
즉『일본의 조선통치는 철도도 놓고 학교도 짓고 한국에 대해 은혜도 베풀었다』 는 발언은 자기가 보기에 과한것같은 한국측의 청구권주장에 대한 농담의 뜻으로 했다고 「구보따」씨는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구보씨」씨는 일본이 은혜를 베풀었다는 의미는 한국측이 보듯 조선통치에 대한 무반서의 차원이 아니라 일본측에서 보기엔 과대한 한국의 청구권주장에 대해 일본측으로서도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말한것인데 진의가 전달되지 않았다고 후회했다는 것이다.
사실 「구보따」발언후 일본안에서는 나이먹은 보수적 사람들은 말 잘했다는주장도 하는 분위기였던게 사실이다.
설령 그의 진의가 그랬다 하더라도 그는 한국민의 응어리진 대일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책임을 면할수 없고 일이 뒤틀어진 다음에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이다.
그 와 강기외상은 10월27일과 3일 각각 삼의원에 불려나가 회담경과를 소상하게 설명했는테 강기외상은 「구보따」의 발언에 관해 『「구보따」대표는보통의 일을 보통으로 말했을뿐』 이라고 옹호했으나 그후 곧 회의를 표시했다.
한일관계의 특수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해 통상의 협상방식으로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살리기위한 전술의 구사에만 급급했던 「구보따」 씨는 그의 망언으로 노출된 무능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었던지 하여튼 그후 일본외교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구보따」씨의 발언은 그의 말대로 즉홍적인 것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즉흥적이기 때문에 그의 솔직한 심정이였고 또 30대이상의 일본인, 즉 식민지시대를 아는 일본인의 공통된 실정의 자연적발로였다고 우리쪽에서는 보았다.
이 발언은 「구보전발언」 (주=일본측표현) 으로서 일본인에서 유명해지고 일본의 신문기자 채용시험문제나 학교임시문제로까지 출제되었다.
식민지시대를 경험한 일본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대체로 「구보따」 유의 대한관을 지니고 있었다는게 나의 솔직한 경험이다.
나중에 상술할 터이지만 우선 내가 겪은 제2의 「구보따」 망언사건도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65년 한일국교정상화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제7차 한일회담을 앞두고 일본측 수석대표 고삼진일씨가 일본정계인사들과 만난 사석에서 『만약 일본이 한국을 30년만 더 통치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문제는없었을 것이다 운운』이라고 말했다.
이 망언이 우리 신문에 보도돼 말썽이 크게 될뻔했으나 당시는 한일양측이 「구보따」 망언때와는 달리 한일회담을 성사시키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양측의 기민한 대응으로 유야무야시켰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당시 우리측 수석대표였던 나는이 말을 듣고 격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 발언이 일본인들간에 있었던 사석발언이고 또 고상씨가 즉시 나에게 자신의 발언이 와전된것이라고 해명하면서 물의를 일으켜 거듭 사과한다고 했고, 당시는 한일회담타결이 쌍방간의 목표였고해서 고삼씨의 해명으로 문제를 일단락지었던 것이다.
지난해 한일양국 사이에 큰 마찰을 불러일으켰던 일본역사교과서 왜곡파동도 「구보따」망언의 연장선상으로봐야만 일본인들의 대한심리를 정확하게 짚을수 있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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