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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인 유머와 결단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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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레이건」미국대통령은 천부척인 유머소질이 있다. 무언가 나사빠진듯한 그의 표정, 그리고 제스처를 동반하는 그의 유머는 반대파의 예봉을 꺾기도하고 설득하기도 한다.
81년11월말 어느날 반대당인 민주당의원들이 득실거리는 하원에서 당시 여론이 들끓었던B-1폭격기생산 승인문제를 놓고 반대하는 민주당의원들앞에서「레이건」대통령은 『그게 비행기였던가? 군용비타민인줄 알았는데…』 라며 능청을 떨었다. 취임직후 캐나다를 방문했을때 그를 반대하는 데모군중들에게 『꼭 고향에.온것같다』며 웃음으로 응수했다.
재치와 유머는 여유가 있는데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법이다.
81년3월30일, 조금은 머리가 돈「존·힝클리」라는 25세의 영웅주의자한테서 총알 한방을 맞은후 수술대에 오른「레이건」대통령은 급히 달려온 부인「낸시」여사에게 『여보 살짝 총을 피했으면 될것을 그걸 깜빡 잊었단 말이야』라고 하는가하면 사건후 『백악관이 정상대로 움직이고있다』는 보좌관들의 보고에 『내가 그런얘기를 듣고 좋아할줄알아!』라며 여유를 보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러한 유머와 여유속에서도 그의 강한 보수주의성향은 꿋꿋하게 지켜왔다. 그리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데는 단호하다.
저격을 받고도 총기규제조치에는 반대한다는 그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고 60년대말 캘리포니아주주지사시절 캘리포니아주립대학생들이 배트남전에 반대하는 반전데모를 격렬하게 벌이자 경찰을 데리고 직접 뛰어들어가 학생들읕 모두 내쫓고 『공부하기싫은 놈들은 모두 나가라』고 외쳤다.
대통령취임후 한 공개석상에서 레이거노믹스로 불리는 「레이건」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한 공화당의원에게 『입닥쳐!』 라고 소리칠 정도로 72세의 노인답지않게 소신을 굽힐줄 모른다.
「레이건」은 19l1년2월6일 시카고 동쪽 2백km떨어진 일리노이주 탐피코렌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세일즈맨의 아들로 태어났다.
「레이건」은 딕슨고등학교 시절 몸이 약해 축구팀에 가입이 거절되기도 했으나 혼자 연습을 계속해 결국은 실력을 인정받아 선수로 뛸 정도로 초지를 굽히지 않는다.
1929년에 들어간 유레카대시절「레이건」은 수영장의 인명구조원이나 접시닦이등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도했다.
가난속에서도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졌던 「레이건」 은 일찍부터 입신출세의 뜻을 세웠고 그 첫목표로 연예계를 택했다.
26세 되던해인 1937년 「레이건」은 5년동안 계속한 스포츠중계 아나운서직을 그만두고 할리우드에 상륙했다.
「레이건」은 총5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스타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할리우드의 화려한 이야기보다는 정치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스트롱 프레지던트의 평을 듣는 「레이건」 의 반공주의는 40년대말 난장판의 할리우드에서 배운 것이었다.
「레이건」 은 2차세계대전중 육군항공대장교로 참전, 46년 대위로 제대한후 할리우드로 복귀 은막의 배우생활을 다시하면서 영화배우연맹회장직(47년)을 맡았다. 그는 이직책을 6년간 지키면서 그의 정치색을 보수·반공으로 굳히는 계기가 됐다.
「레이건」 은 그 이전까지는 공산주의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나는 미국공산당이 노조에 침투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들이 영화산업을 장악하기 위해 무자비한 파업과 선동을 일삼고 본분을 망각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것을 보고서야 사실을 깨달았다.』「레이건」은 이 할리우드의 난장판이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른것으로 확신했으며 이같은 경험은 그의 장래의 정치성향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80년선거유세때 『우리가 소련을 다루어온 방법은 비현실적이었다. 그들은 오직 한길밖에 모른다. 세계를 제패하겠다는데만 몰두하고있다』고 강경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레이건」대통령의 정치입문은 상당히 늦었다. 55세때인 66년 캘리포니아주지사선거전에서「패트·브라운」을 물리치고 당선된 것이 첫관문 돌파였으니 꽤 늦은 편이다.
그러나「레이건」은 68년 「닉슨」과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나섰다가 중도에서 포기한 다음 76년에는「포드」와 경합했으나 지명전에서 패배하는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재기에 성공, 80년 제40대 미국대통령에 당선됐다. 80년선거유세때 일부에서는「레이건」을 배신자 혹은 거짓말장이라고 혹평을 했다.
원래 「레이건」 은 진보적인 태도를 갖고 민주당에 몸을 담았으나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낀후 48년「트루먼」대통령에 대한 마지막지지를 보낸후 민주당과 결별했다.
또 캘리포니아주지사 시절에는 선거공약인 주정부지출삭감을 내팽개치고 반대로 엄청난 예산증액을 기록해 비난을 듣기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흠은 그의 실용적인, 그리고 타협적인 성격에서 나온것으로 해석할수있다.
80년7월「레이건」이 공화당후보지명을 따냈을때 미시사주간지뉴스위크는 다음과같이 평했다.『「로널드·레이건」은1964년 「배리·골드워터」 이후 가장 보수적인 대통령후보다. 그러나 그는「골드워터」와는 달리 실용주의적인 타협할줄 아는, 총명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상식에 벗어나는 일을 하지않는 인물이다.』 <이규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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