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7) 제 80화 한일회담(5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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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제2차 한일회담은 53년 4월15일 일본 외무성 회의실에서 첫 회의가 열렸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3개월만에 별 진전없이 끝났다.
우리측에서는 금낙직주일공사를 수석대표로 유태하주일참사관, 임송본·장기영· 장경근(이상 외교위원회 위원자격)· 홍진기법무부 법무국장, 지족량상공부수산국장, 최규하주일총영사가 대표로 참석했다.
일본측에서는 오촌승장외무차관을 수석대표로 외무 법무성등 관계부처의 실무자들이 대표로 나왔다.
정부는 일본측이 평화선 선포및 그에 따른 일본어선의 나포문제등을 집중적으로 물고늘어질 가능성에 대비해 법률전문가인 홍국장 외에 장경량씨를 대표단 구성에 보강한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장씨는 실제로 분과위 구성때 어업관계위에 배정됐으나 일본측이 어엄관계위 회의에서 법이론의 전개대신 실제문제를 다루자고 제의함으로써 법률전문가로서의 역량을 크게 발휘할수 없었던 것으로 듣고 있다.
5개분과위가 구성돼 3개월동안 열린 2차회담이 별 진전없이 끝났다는 것은 서두에서도 지적했지만 그에는 한일양측간에 이 회담에 임하는자세가 근본적으로 달랐던데 주인이있다.
우선 일본측이 첫날 회의에서 주장한 내용을 보면 이 회담에 암하는 일본의 자세를 명백히 읽을 수 있다. 그들은 상호 공관설치문제, 어선나포사건문제, 한국인 송환문제등을 조속히 해결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즉, 일본정부는 한국의 독립으로 인해 생긴 양국간의 현안문제를 한가지 두가지 해결할수 있는 문제부터 해결해 나가자는 1차회담 때의 방침을 그대로 답?했다. 또 가급적이면 외교사절의 교환으로 우선 양국간의 국교정상화를 이루어놓고 서서히 현안문제를 처리하자는 자세였던 것이다.
우리측은 일본측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갖고 있었다.우리는 한일회담은「한일평화회담」이라는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기본정신 아래 한일병탄이라는 군사력에 의한 일방적인 강탈이 불법적이니만큼 이 회담을 통해 한일양민족간의 그릇된 과거역사를 청산하고자 했다.
따라서 2차적으로는 우리 민족의 해방과 광복으로 인해 새로 수립된 우리나라와 일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회담이 되어야 한다는 겅책방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덧불인다면 이 회담이 미국의 극동정책 일환으로 마련된 성격이 강했다는 점을 지적할수 있다.
그러나 2차회담은 1차회담과는 달리 토의의 힝식을 사전에 합의해 비교적 그에 충실하려 했다는 것은 일단의 전진으로 평가돼야 할것이다.
즉, 쌍방대표들은 l차회담이 시종양측간의 법이론 전개 경연장 비슷한분위기였던데 반성하고 2차회담의 분과위 회의를 통해서는 전반적으로 쌍방이 법이론적인 토의를 삼가는 대신 실제적인 면에서 고찰, 토의키로 합의했던 것이고 이는 회의전반을 통해대체로 지켜졌다.
그래서 어업문제와 재일한국인 처우문제등에 있어서는 상당한 세목까지 쌍방의 입장이 개진돼 어떤 문제는 잠정적인 합의가 성랍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측은 근본적으로 회담에 성의가 없었다. 회담이 진행되던 6월 일본은 한국의 속셈을 떠볼양으로 평화선의 중요지점인 독도에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보내 독도에 일본영토라는 푯말까지 세우고 우리 어부 6명을 강제로 퇴거시키는 포거를 자행했다.
일본은 또 7월12일 해상보안청 배를 독도에 보냈다. 이에 우리 수비대는 일본배애 거침없이 발포해 우리의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김수석대표도 회의를 통해 독도를 의제에 포함시키라는 일본측 주장에대해 한마디로 남의 나라 영토에 관한 논의는 내정간섭이라고 일축했다.
평화선문제에 우리측이 강경한 것을 안 일본은 회을 더 계속할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던 터에 한국휴전협정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네바정치회담이 열리게 됨에 따라 정세를 관망한다는 핑계를 대고 휴회를 재의했다. 제네바회담결과에 따라 유리한 입장에서 회담을 전개해보자는 것이 일본의 계산된 휴회 제의의 의도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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