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빈사 상태 국정원 이대로 둘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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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가 안위는 2개의 핵심 능력에 의해 지켜진다. 하나는 군사적 능력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공안능력인 국가 보안.방첩 능력이다. 군사력이 경성 위협에 대한 대응력이라면 보안.방첩 능력은 간접침략이라고도 불리는 연성 위협에 대한 대응능력이다. 국가 안보는 바로 이 두 능력이 균형을 이루면서 지탱된다. 불법 도청 파문과 강 교수 사태는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우리의 연성 위협 대응 능력인 보안.방첩 시스템에 치명적 내상을 입혔다. 불법 도청 파문으로 이 시스템의 중심축인 국정원은 이미 식물상태가 돼 버렸다. 거기에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강 교수 불구속 수사 지휘는 이미 관속에 들어가 있던 국가보안법에 대한 마지막 못질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간접침략인 연성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됐다.

북한 정보당국이 이를 놓칠 리 없다. 그들이 시대정신에 충실해 이러한 유리한 국면을 팔짱 끼고 보고만 있을 리 만무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는 북한의 치열한 대남 적화 정보공작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이 위협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했던 현재적 위협이었으며 폭파.납치.테러와 같은 폭력을 수반한 모습으로 전개되기도 했지만 암처럼 은밀히 퍼져 우리 사회의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을 병들게 하는 형태로도 전개됐다. 지난 세월 우리의 안보 현장은 이러한 북한의 정보 공작과 우리의 방첩.공안 시스템이 맞부닥치는 필사적 투쟁의 장이었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북핵 문제만 해결되면 북한의 위협은 더 이상 문제될 것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그러나 북핵 문제만이 북한 위협의 전부는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북한의 대남 적화공작의 실제적 위협에 직면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북한이 김일성의 유훈이기도 한 '남한 혁명 역량 강화'의 끈을 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만 일방적으로 스스로 무장 해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히 대응 체제를 다시 추슬러야 한다. 이는 결코 시대정신을 망각한 색깔론이 아니다. 허술해진 우리의 방첩 시스템을 다시 제 모습으로 복원시키는 것은 국가안위를 튼튼히 하기 위한 마땅한 조치일 뿐이다.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단단하고 효율적인 내부 방비 태세를 갖추는 것은 제대로 된 모든 나라가 취하고 있는 국가 안보의 기초적 작업이다.

이를 위해 시급한 일은 핵심 기관인 국정원이 현재의 침체에서 벗어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성원해 주는 일이다. 불법 활동은 법대로 단죄하되 그 과정에서 국내 보안 기능을 아예 약화시키는 또 다른 콜래터럴 데미지의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유명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는 최근 신문 칼럼에서 미국 정보기관의 개혁작업이 미진하다고 비판하면서 "정보기관을 바로 세우는 일은 미국의 사활적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초강대국 미국도 이렇다.

노무현 대통령의 표현대로 국정원은 '칼'이다. 이 칼을 날카롭게 다듬어 나라를 튼튼히 하는 일은 우리에게도 '사활적 사안'임에 틀림없다. 냉전 체제의 극복, 평화 체제의 구축과 같은 거대한 정치적 담론보다는 국정원의 활성화와 같은 안보 구조의 세부 사안을 먼저 단단히 챙기는 것이 국가 안보를 위한 정도일 것이다.

이병호 전 안기부 차장·울산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