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담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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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난 봄 시할머님께서 오셔서 만들어 주신 고추장이 비빔밥을 좋아하는 애들 아빠 덕분에 바닥이 나고 말았다.
한달 전쯤 이었나보다. 아침식탁에 고추장이 없다며 짜증을 내는 아빠에게 『오늘 엄마네 집에 가서 가지고 올테니 아침만 그냥 들고 나가세요』했더니 『도대체 언제까지 친정에서 고추장·된장 가져다 먹을테야. 당신은 미안하지도 않아.』『그럼 어떡해요. 담글줄 모르는데….』
『못하는게 무슨 자랑이야. 결혼한지 벌써 몇년째인데 여태 고추장·된장도 못 담근다는 거야』하며 숟가락을 놓고 나가는 아빠가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출근한 뒤 혼자 생각해보니 사실 간장·고추장, 하다못해 김장까지도 한번 담가 보지 않고 친정과 시댁에서 번갈아 가며 얻어다 먹었던 것 같다.
정말 맏며느리치고는 너무나 모자라는 것 같아 고추장을 혼자 만들어 보리라며 앞치마를 둘렀다. 지난 봄 시할머님께서 만드실 때 어깨 너머로 본 기억을 되살려 만들려고 하니 생각이 안났다.
그까짓 고추장쯤 마음만 먹으면 못할 바도 없겠지 했는데, 뜻대로 잘 안돼서 요리책을 펼쳐놓고 엿기름을 거르고 밀가루를 삭힌 다음 레인지위에 올려놓고 저어가며 끓여서 식힌 후에 고춧가루와 메줏가루를 넣고 소금간을 하고 나니 제법 고추장 티가 나는 것 같다.
저녁에 들어온 아빠에게 혼자서 고추장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레 얘기했더니, 아빠는 『이제야 주부 노릇을 하는구먼』하며 웃어댔다.
며칠 전 시할머님과 시어머님께서 다니러 오셨기에 밥상에 고추장을 놓아 드리며 혼자 만들었다고 말씀드렸더니, 맛을 보시며 간도 맞고 아주 잘 만들었다고 칭찬해주셨다.
이제 동서에게도 조금씩 덜어주고 고추장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된장·간장도 혼자 담가서 살림하는 재미를 느껴야겠다.

<경기도 안양시 안양6동 명학아파트 5동5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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