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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전통시장·SSM, 손 잡으니 함께 살길 열리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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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 10일 서울 중곡제일골목시장이 고객에 보낸 문자메시지. 시장 안에 있는 이마트에브리데이의 행사도 알려주고 있다.

“우리 시장 설 행사 때 이마트 수퍼도 세일해요~.” “수퍼에서 3만원 이상 장 보면 시장 주차장이 무료에요.”

 골목 상권을 파괴한다며 기업형 수퍼마켓(SSM)을 배척하던 전통시장 상인들이 오히려 수퍼 홍보에 나선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SSM에서 만든 대형전단 1면은 온통 전통시장 설 행사 안내 뿐이다. 대기업 수퍼와 전통 시장이 함께 맞는 따뜻한 설. 서울 중곡제일골목시장은 이런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는 곳이다.

 늦추위가 매섭던 지난 11일 이마트에브리데이 중곡점을 찾았다. 중곡제일골목시장 안에 있는 이 점포는 지난해 9월 ‘전통시장 상생 1호점’을 표방하며 채소·과일·수산물 같은 신선식품을 자진 철수해 기대를 모았다. <본지 2014년 9월23일자 b3면>

 수퍼 맞은편은 시장 상인회 역할을 하는 중곡제일시장협동조합 사무실이다. 박태신 조합 이사장이 이마트 직원을 보더니 “어제 우리 시장 고객 7000명한테 보낸 문자메시지”라며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중곡제일시장 설 명절 행사 안내’라는 제목 아래 ‘이마트에브리데이 중곡점:맥심모카믹스 1만4800원, 하기스보송보송팬티형 9000원…’하고 수퍼 행사까지 안내했다. 이마트 직원이 놀란 얼굴로 연신 고마워했다. 박 이사장은 “수퍼한테 받은 게 있으니 우리도 보답해야지”라며 미소지었다. 그러고보니 건너편 수퍼 정문에 잔뜩 쌓아놓은 설 특집 전단지 표지는 전통시장 행사 안내문이다.

 요즘 이마트 수퍼 고객은 조합 마당에 있는 시장 전용 주차장을 편하게 쓴다. 예전엔 30분에 1500원씩 하는 주차료가 부담이었다. 하지만 시장 조합에서 수퍼에는 300원으로 깎아주면서 3만원 이상 구매하면 ‘공짜 주차’도 가능해졌다. 무엇이 시장 상인들의 마음을 바꿔놓은 걸까.

채소·과일·수산물 등 신선식품을 뺀 이마트에브리데이는 매장 입구 벽에 시장 안 신선식품 가게 지도를 그렸다.

 채소·과일가게의 경우 ‘자진철수’ 효과가 있었다. 수퍼 맞은편 ‘농협식품전문점’의 이철재(32)씨는 “우리 가게는 단골이 많고 값도 싸지만, 수퍼가 가격행사를 할 때는 단가를 맞추기 힘들었다”며 “수퍼가 채소·과일을 안팔자 우리 가게로 사러 오는 주부 고객이 늘었다”고 했다. 이 시장에서는 구매액에 따라 사은쿠폰을 주는데, 쿠폰 발행 증가율을 보면 가게 매출도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박 이사장은 “신선식품 가게는 시장의 10%에 불과하다”며 “지난해 11월에 수퍼 서쪽 출입문을 터준 것이 정말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다. 수퍼에 들어올 수만 있고 시장 쪽으로 나갈 수는 없게 만들어놨던 출입구 장치를 없애고, 수퍼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분리된 시장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신선식품 판매 중단 때 “어차피 수십년된 우리 단골들은 수퍼 안가기 때문에 아무 상관없다”,“길을 막고 있으면서 생색내기 상생쇼나 한다”던 상인들의 마음도 서서히 풀렸다. 드나들기 편해지자 수퍼 손님도 오히려 더 늘어났다.

중곡시장 설 행사 안내문이 1면인 수퍼 전단지를 고객이 보고 있다.

 다른 가게들처럼 시장 운영비를 내면서 ‘식구’로 인정도 받았다. 박 이사장은 “시장 옆에 따로 있었다면 우리 손님을 뺏어가겠지만 이 수퍼는 시장의 일부”라며 “수퍼가 쉬는 2, 4주 일요일엔 시장 매출이 떨어질 정도”라고 말했다. ‘엄마네 생선’ 김경일(45·여)씨는 “젊은 손님들은 브랜드 수퍼 찾아왔다가 우리 시장 단골이 된다”며 “나도 생필품은 그 수퍼 가서 산다”고 했다.

 수퍼도 기대 밖의 효과를 보고 있다. 이날 수퍼에 장을 보러 온 주부 이명순(35·중곡1동)씨는 “신선식품이 빠진 뒤에 오히려 수퍼에 더 자주 온다”고 했다. 예전부터 채소나 과일은 시장에서 샀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고, 수퍼 물건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곡점은 매장의 3분의 1을 차지하던 신선식품이 빠진 자리를 가공식품·애견용품·문구·화장품 등으로 채우면서 제품 종류를 약 1000개 늘렸다. 김주태 중곡점장은 “신선식품이 빠지면 매출이 30% 정도 줄 것이라고 우려했는데 실제로는 10% 정도만 빠졌다”며 “우리도 주변 가게 덕을 본다”고 말했다. 수퍼에서 몇걸음만 가면 20~40년씩 시장에서 터전을 잡은 탄탄한 경쟁력의 신선 식품 가게가 있기 때문에 손님들이 한 매장처럼 이용하면서 덜 불편해한다는 것이다.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수퍼 입구 벽면에 커다랗게 채소·과일·수산물 가게 지도까지 그려놓았다. 김군선 신세계그룹 사회적책임(CSR) 담당 부사장은 “내가 먼저 양보하지 않고는 상생이 안된다”며 “전통시장 안에 시장 먹거리를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쉼터나 어린이를 둔 주부가 자주 찾는 장난감도서관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사진=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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