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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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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94년 11월 17일,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호주 시드니를 방문한 김영삼(YS) 대통령은 국정목표를 '세계화'에 두겠다고 선언했다. "APEC 회의를 통해 세계 속에 기회가 있음을 확인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국민의 첫 반응은 "국제화를 한다더니 뜬금없이 세계화는 또 무슨 소리냐"는 것이었다. 당시 세계화는 단어조차 생소해 학자들의 해설이 붙을 때였다. '국제화를 세게 하면 세계화가 된다'는 농담이 떠돌기도 했다.

이듬해 YS는 '세계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세계화의 비전과 전략'도 발표했다. 영어 명칭은 'Globalization'이 아닌 'Segyehwa'란 고유명사를 썼다. 그러나 세계화의 꿈은 97년 말 외환위기를 맞아 물거품이 됐다. 아예 나라를 쪽박 찬 신세로 주저앉혔다. 그 탓인지 세계화는 우리에게 그다지 호감을 주지 못한다.

세계화는 하나의 체제로 세계를 통합해가는 과정이다. 국가 및 지역 간에 존재하던 상품.서비스.자본.노동.정보 등에 대한 인위적 장벽을 제거해 '국경 없는 지구촌'을 만들자는 취지다.

세계화에 대한 찬반양론은 팽팽하다. '제로 섬 사회'를 쓴 레스터 서로 교수는 '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란 책에서 "세계화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빈곤의 선택과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요즘엔 '세계적 통치(Global governance)''세계정치(Cosmopolitics)' 등 신조어도 등장했다.

'세계화=21세기형 제국주의'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미국과 서구 대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고, 개발도상국 또는 세계 체제의 주변부 문화를 예속시킴으로써 국가적 독자성을 잃게 한다는 것이다. 미국 햄버거에서 이름을 딴 '맥도널드화(McDonaldization)'라고 혹평하는 학자들도 있다.

APEC 개최지 부산이 반(反)세계화 시위에 긴장하고 있다. 국내외 시민단체들은 '반세계화 여론이 얼마나 뜨거운지 보여주기 위해' 부산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일 계획이다. 경찰은 반세계화 시위 전력이 있는 외국인 998명에 대해 입국금지 조치를 내렸다. 지난해 11월 APEC 회의가 열린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이어 부산이 세계화와 반세계화의 한판 대결장이 될 모양이다. 항의 시위는 말릴 수 없지만 물리적 충돌이 난무하는 난장판은 피했으면 한다.

고대훈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