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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in&Out 레저] 지금 고궁은 울긋불긋 단풍 '꽃대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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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애련지에서 바라본 연경당 앞 공터.

글=윤돌 <dol@yundol.com>('마음으로 읽는 궁궐 이야기' 저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shotgun@joongang.co.kr>

*** 낙엽마저 넉넉한 맏형 - 경복궁

위에서부터 경복궁 향원지, 창덕궁 관람정,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正宮)이자 나라의 틀을 만들면서 지은 조선의 첫 번째 궁궐이다. 궁궐조형제도(중국의 왕성과 궁궐 제도를 수용해 우리 실정에 맞게 궁궐을 짓는 표준이 된 방법)를 충실히 따라 그 격식과 품위가 살아 있다. 하지만 그 품위 못지않게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 알알이 맺혀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가 있는데 그 뒤에서 경회루 앞까지의 넓은 공간에는 가을이 절정을 맞고 있다. 넓은 뜰을 커다란 은행나무가 온통 노란 색으로 뒤덮고 있는 그곳에는 의자가 넉넉해 친구.가족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사방에 노란 은행잎이 가득해 사람의 마음도 노랗게 물들 것 같다. 경회루 앞쪽 공간은 궐 안에 있던 관청(궐내각사.闕內各司) 자리로, 여러 나무들이 잎을 곱게 떨어뜨리고 가지에는 울긋불긋 아름다운 빛깔을 가득 품고 있는 곳이다. 넓게 깔려 있는 나뭇잎을 "사그락 사그락" 밟으면 발밑에서 스민 가을이 마음을 적신다.

경복궁의 후원에 있는 향원지(香遠池)는 사계절 내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다. 앞쪽 공간인 경회루와 달리 번잡하거나 북적이지 않으며 포근함과 오붓함이 있다. 내전(內殿) 지역에서 담장을 넘으면 노란 은행나무가 가득한 공간이 펼쳐진다. 아이들은 은행잎을 줍느라 정신이 없고 어른들의 얼굴엔 행복이 감돈다. 향원지 주위에 가을이 오면 연못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든다. 물에 떨어진 나뭇잎은 물속의 하늘을 나는 듯 보인다. 연못가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자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 느긋하고 호젓하게 - 창덕궁

창덕궁은 얼마 전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될 만큼 조선궁궐 중 가장 온전하게 전각과 구성 공간이 남아 있는 궁궐이다. 그중에서도 후원 공간은 이름난 가을 산에 온 것처럼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산언덕과 계곡마다 들어찬 가을빛과 한쪽에 의젓하게 자리한 정자의 조화는 왜 창덕궁의 후원을 아름다운 공간이라 하는지 짐작하게 한다.

창덕궁에 간다면 후원 쪽을 관람할 수 있는 특별관람을 선택하는 게 좋은데 아쉬운 점은 관람 시간과 인원이 하루 3회, 1회 50명으로 제한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람이 제한돼 있기에 오히려 오붓하고 느긋하게 가을 궁궐을 만끽할 수 있어 좋다. 창덕궁 600주년 기념으로 11월 한 달간 일요일에 한해 자유 관람을 할 수 있으니 이 기회를 이용하는 것도 좋겠다.

창덕궁의 후원은 내전 공간을 지나 언덕을 넘으며 시작된다. 언덕에 오른 눈길은 맞은편 듬직하게 자리한 주합루(宙合樓)와 마주하게 되는데 그 안으로 포근하게 꿈 같은 가을 정취가 숨어 있다. 붉은빛을 두른 고목들이 연못 주위를 둘러싸고 연못에는 푸른 하늘이 담겨 있다. 연못에 두 기둥을 담그고 있는 아름다운 부용정의 모습은 사람의 넋을 잃게 하기에 충분하다. 몇 개의 전각을 지나 후원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왼쪽으로 다시 연못이 나오고 그 옆으로 오솔길이 펼쳐진다. 연못 가장자리에 부채꼴 모양의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관람정(觀纜亭)이다. 나뭇잎 모양의 초록색 현판이 있는 부채꼴 정자인 관람정 주위로는 가을의 향기가 그윽하다.

창덕궁의 후원에서 가장 깊숙한 공간은 옥류천.소요정.태극정.청의정 등이다. 후원 뒤쪽에서 흘러내린 물과 산자락에 붙어 있는 어정(御井)에서 솟은 물이 작은 개울을 이루어 흐르는데 이것이 옥류천(玉流川)이다. 이곳에 서면 깊은 산중에 와 있는 듯 소란스러움은 없고, 적막함이 느껴질 정도로 고요하다. 가족 혹은 연인끼리 정자 한쪽 귀퉁이에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 다람쥐.청설모 친구 삼아 - 창경궁

창경궁은 유별나게 조선의 다섯 궁궐 중 가을을 닮아 있다. 그렇다고 낭만적이거나, 높고 푸른 하늘의 맑음 등의 그럴 듯한 모습과는 다른 이야기다. 크고 아름다운 전각은 그럴 듯하게 남아 있되 속과 겉이 많이도 상처를 입은 궁궐이다. 많은 전각이 사라지고 그 흔적인 주춧돌과 터만 아픈 속살을 드러낸 채 잔디나 뜬금없는 나무들이 그 공간을 차지해 버린 궁궐이 바로 창경궁이다.

경춘전 뒤쪽에 철퍼덕 앉아 뒤쪽 화계(花階)와 통명전(通明殿)을 동시에 바라보자. 나무는 거짓 같은 겉모습을 하나씩 털어 내리며 진실을 드러내고 다람쥐와 청설모는 나무 사이를 오가며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얼기설기 얽힌 세상에 턱하니 걸려 있는 보름달처럼 까치집이 나뭇가지를 밝혀주고 있다. 낙엽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만 쌓여 있고, 경춘전 앞 공간에서 소란은 잦아든다. 굳이 울긋불긋한 단풍을 보지 않더라도 가을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신비의 공간, 흡사 우리네 삶의 궤적과 교훈마저 펼쳐 보여주는 다소 건방진 공간이 바로 경춘전 뒤쪽 초라한 반 아름의 공간이다.

통명전 옆 연못에는 밤이고 낮이고 봄이고 여름이고 함빡 피어 있는 연꽃이 있다. 그 연꽃을 바라보며 향기에 취해 다리를 건너고, 계단을 오르는 가을 길은 하루하루 오르는 삶의 계단과 같다. 계단을 올라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공간은 유난히 사진을 담는 모습이 많다. 통명전 화계 뒤편을 걸을 때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휙 돌려 나무들 사이로 전각들을 굽어보며 걷는 것이 좋다. 전각을 둘러싼 나무들의 가을 합창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춘당지는 유생들이 과거의 마지막 시험을 치르기도 한 춘당대 아래 있던 연못이다. 원래 위쪽의 작고 동그란 지역만 의미했으나 친농(임금이 직접 권농일에 농사일을 행하던 것)을 하던 내농포의 공간으로 일제시대에 확대됐다. 춘당지에 비친 가을 하늘과 나무의 풍경, 낙엽길, 낙엽 지는 나무들은 가을을 힘껏 합창하고 있다.

춘당지를 감싸는 길에 취해 어질한 마음으로 걷다 보면 난데없이 하얀 유리집과 분수 등이 있는 식물원이 나타난다. 식물원 앞길을 통해 관덕정으로 오르는 길에는 동백꽃처럼 붉은 단풍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흡사 문지기와도 같은 그 나무를 지나면서 또 한번 가을은 방문객을 마중한다.

춘당지에서 창경궁 담장을 끼고 내려오는 길에는 낙엽이 카펫처럼 깔려 있어 이 길을 걷자면 '사각사각' 가을이 들린다.

궁궐 정문을 나서며 잠시 들러야 할 공간이 있다.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의 왼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넓은 잔디밭과 나무들이 가득한 곳이다. 사이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거나 그 안 어느 곳에 있어도 온통 낙엽과 가을이다. 자리를 깔 것도 없이 철퍼덕 앉아 지난날을 갈무리할 만한 공간이 되어줄 것이다.

■경복궁 관리사무소:02-732-1931 / 창덕궁 관리사무소:02-762-0648 / 창경궁 관리사무소:02-762-4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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