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82)여양 진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여양진씨의 시조는 고려 제17대 인종때의 신호위 대장군 진용후.
그는 제16대 예종때 호분위대장군을 지냈으며 인종4년(1162) 이자겸의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신호위대장군에 오르고 여양군에 봉해졌다. 이를 인연으로 후손들이 「여양(충남홍성군장곡면산성리)」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의 선대는 원래 중국사람으로 북송말엽 우윤벼슬을 지내다 난을 피해 고려로 피신, 여양현에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대북에 세계종친회>
진씨의 관향은 여양외에 삼척·나주·강릉·흥덕·양주·덕창·남해·여주·진산등 여러본이 있으나 모두가 시조 진용후의 후손으로 나주·삼척·강릉등은 이미 「여양진씨대동보」에 합보함으로써 사실상 여양진씨로 통일되고 있다.
인구는 약13만명으로 성별인구순위49위. 그러나 진씨는 중국대륙을 비롯, 동남아 일대에 약1억이 살고있어 동양의 대성이라고 진씨들은 말한다. 자유중국 타이페이에 있는 진씨세계종친회는 세계각국에 살고있는 진씨의 친목을 다지는 국제기구.
진씨는 고려중엽부터 조선초까지 꾸준히 가문의 기반을 다져왔다.
시조 진용후의 아들인 진준이 아버지를 이어 고려조의 진씨의 번영을 열었다. 그는 명종조에 동북면병마사행영겸 중군병마사·좌군병마사·삼지정사·병부상서등 군의 요직을 두루 거친 덕장으로 전한다.

<문신살해를 반대>
의종24년 정중부의난이 일어났다. 무신들이 문신의 가족까지 대량학살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때 진준은 무신이면서도 「문신의 무차별살해」를 반대, 많은 문신가족들을 죽음에서 구했다. 훗날 세상사람들이 「진무악인」이라고 부르게 된 동기가 바로 진준의 이같은 덕행에서 비롯된 것이라한다.
그의 아들 광순(대장군), 광수(병부상서), 광경(대장군), 광의(대장군), 광현(대장군)등 5형제 또한 고려조의 무신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렇듯 여양진씨는 「무」로써 가문을 일으켰다.
고려 신종∼강종조의 진화(호 매호)는 전통적인 「무신」의 가문에 「文」의 꽃을 피운 대문장으로 백운거사이규보와 나란히 문명을 떨쳤다. 강종조에 한림학사를 거쳐 서장관으로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우사련·지공주사등을 역임했던 그는 특히 시에 빼어났다.
『서화사소소 북채혼몽 좌득문명단천동일욕홍<서쪽의중화(송나라)는 쓸쓸히 기울고 북채(금나라)는 아직도 혼몽속에서 문명의 아침을 기다리고 앉아있는데 하늘동쪽(고려)은 아침해가 붉게 솟으려하고있다>』진화가 서상관으로 금나라에서 지었다는 이 시는 당시 아시아의 정세와 고려의 앞날을 예언한 명시로서 조선조의 문인들에게 까지도 널리 회자됐다. 당대의 대문장 이규보는 그의 문재를 말하면서 『공의 장편은 사어가 분방하여 실로 하늘밖에서 노닌다』고 극찬했다.
맏형 진천(어사대부), 둘째형 진온(예빈경)등도 모두 시문으로 이름을 날려 세간에서는 이들 형제를「연주」라 칭송했다한다.
이밖에 인종때 김부식과 함께 묘청의 난을 토벌, 삼지정사에 까지 올랐던 진숙, 고종조에 문하시낭평장사를 역임한 진박등이 고려조에 가문을 빛냈다. 진박은 현종원년 거란이 목종의 폐위를 문책하면서 내정에 간섭하자 이를 답변하기위한 사신으로 거란에 다녀오기도 했으며 현종11년 거란의 3차침입때 잡혀가 억류되는 시련을 겪기도했다.

<문과급제자도 27명>
여양진씨는 조선 초기까지 착실히 가문의 기반을 다져왔다. 조선조에서 배출한 문과급제자수는 총27명. 그러나 중종조에 접어들면서 권신 김안노가 일으킨 정변에 휩쓸려 진씨가문은 쇠퇴의 길을 걷는다.
중종19년 당시 예조판서였던 김안노는 심정·이항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누차 옥사를 일으켜 명신 이언적·정광필등을 귀양보냈다. 이같은 김안노의 횡포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중의 한사람이 여양진씨 가문의 진식(진식)이다. 중종밑에서 대사간, 호조참의, 부제학등을 역임했던 그는 김안노의 횡포를 탄액하다 오히려 김안노 일파에 몰린다. 이사건으로 진식의 형인 진우는 죽음을 당하고 진씨일문은 관직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은거, 가문의 명맥을 이었다.
그러나 여양진씨는 은둔과 도피의 세월만을 산것은 아니었다.
진무성장군은 임진왜란당시 백의종군으로 용맹을 떨쳐 가문의 기백을 지킨 명장이다. 27세의 나이에 전쟁에 출전했던 그는 충무공 이순신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이순신의 참모가되어 남해의 여러차례 대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 전공을 쌓았다고 『난중일기』 는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그에 관한 일화 한토막.
인조5년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이 때 중군으로서 통제사의 직무를 대행했던 진무성은 왕이 강화로 옮겨갈때 풍랑으로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이에 노한 왕이 포리를 보내 그를 체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때 진무성은 『왕이 정말 포리를 보냈다면 내 후임자도 함께 보냈을터인데 그렇지않은것을 보니 너는 가짜사신임에 틀림없다』면서 포리를 죽이려했다. 그후 포리의 보고를 들은 왕은 『과연 용기있는 사람이다』면서 귀성군수에 임명했다한다.

<이름난 효자 진구주>
이밖에 조선개국원종공신으로 태종때 검교찬성사를 지낸 진기서, 세종때 직제학 진의귀, 세조때 성삼문의 외가로 사대신사건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한 진유번, 명종때 부제학·대사헌등을 지냈던 진복창, 인조때 유명한 효자 진구주등이 두드러진다.
진복창은 국문학사의 귀중한 자료인 『역대가』『만고가』의 저자이기도하다. 여양진씨는 광복후 사회각계에 많은 인재를 냈다.
진헌식(전내무부장관·제헌국회의원) 진의종(전보사부장관·국회의원·민정당대표위원) 진필식(전외무부차관) 진봉현(전농림부차관) 진태귀(전서울고법부장판사) 진갑덕(이박·전영남 대학원장) 진종채(예비역육군대장·전3군사령관) 진동식(의박·전연대의료원장) 진용환(의박·전서울대의대교수) 진성규(부장판사) 진덕규(정박·이대교수)씨 등이 돋보이는 인물들이다.
▲다음주는 「학성 이씨」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