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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씨 소설『어떤 생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달의 소설중에는 현기영씨의『어떤 생애』(문예중앙 가을호), 양선규씨의『고비』(세계의 문학 가을호), 박양호씨의『만신전』(한국문학) 등이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현기영씨의『어떤 생애』는 일제말과 해방후의 4·3사건을 거치면서 제주도 사람들이 겪는 비극을 그려내고 있다.
「종수」라는 어린이와 그 가족의 죽음을 통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삶의 근거 자체가 뿌리뽑히는 아픔이 절실히 드러난다.
이데올로기의 광풍, 충동적으로 생겨나는 저주의 물결속에 우왕좌왕하다가 끝내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 역사의 한 잘못된 부분이 빚어낸 상처다.
이 소설은 이러한 민족사적 비극을 한 가정의 붕괴속에 집약시켜 보여줌으로써 작품으로서의 완성을 이루고 있다.
딴 여자를 얻어가고 또 그로 인해서 행방불명되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기다리기 위해 죽음속에 남는 할머니,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죽었다고 말하게 아들에게 요구하는 어머니 등 이 가족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면서 비극으로 빠져드는 모습과 함께 그러한 외부의 힘이 가족속에 심어주는 심리적 갈등까지 보여준다.
이 소설은「종수」라는 소년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가족속의 비극과 사회전체의 증오속에 한 소년이 견뎌내기는 어려웠다. 작가는 한라산의 물과 바닷물이 부딪치는 곳에서 죽어 가는 소년의 최후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빚은 비극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양선규씨의『고비』는 광개토왕비의 일본인에 의한 조작을 다루면서 이 사건에 인류의 양심을 지키려는 일본인과 국수주의적인 일본인을 연관시켜 그들의 갈등을 첨예화시켜보고 있다. 소설속의 소설이라는 이 작가가 즐겨 쓰고 있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박양호씨의『만신전』은 15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늙은 무당이 용신제를 지내다가 물에 빠져 죽는다는 줄거리다.
변하는 세계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한 무당의 모습도 눈에 띄지만 이이야기를 무리없이 써내려간 박씨의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도움말주신분=김윤식·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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