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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랏차차 '88세 청년'] 9. 사사오입 개헌 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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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54년 서울 정동 배재학당에서 열린 여야 국회의원 친선 야구경기를 마치고 선수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이 필자, 오른쪽 첫째는 김두한, 둘째는 김영삼이다.

나는 1950년 5월 30일에 있었던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 고향 개성에서 출마하면서 정치인으로 입문했다. 서른세 살이었다. 형 중산(민완식)과 함께 반공전선에 앞장섰던 동지와 친지들이 한마음으로 후원했다. 내 처는 선친이 선물해 준 소중한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팔아 선거자금으로 보탰다. 그러나 공보처장을 지낸 김동성씨에게 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54년 제3대 총선에서 나는 서울 동대문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서른일곱 살이었다.

제2대와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사이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서울이 함락된 뒤 나는 서울대 공대 기숙사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공산당의 수색을 피해 보위대원들이 쓰고 다니던 밀짚모자로 위장하고 개성 출신 사업가인 김종호 전 세창물산 회장의 처가 다락방에 숨어 여름을 났다. 9.28 서울 수복이 눈앞에 다가오자 공산군은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도 남자란 남자는 모두 끌고 북으로 후퇴했다. 나는 여자로 변장하고 창신동 개천가에 숨어 위기를 넘겼다.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당으로부터 입당 제의를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나를 따로 불러 입당을 종용했다. 하지만 자유당과의 인연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내가 입당한 지 얼마 안 돼 자유당은 이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을 추진했다. 그래서 터진 것이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 파동이다. 자유당은 54년 11월 29일 '대통령 3선 금지' 폐지를 주요 내용으로 한 헌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불법으로 통과시켰다. 개헌안은 이틀 전 국회 표결에서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로 개헌 정족수인 136표에 한 표가 모자라 부결됐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재적의원 3분의 2는 135.333명인데 소수점 이하 숫자는 한 명의 사람이 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하면 135명이 된다"는 억지 주장을 펴면서 29일 부결 선언을 번복, 개헌안 가결을 선포했다. 나는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을 탈당했다. 자유당에서 나와 뜻을 같이 한 사람은 13명이었다. 이중에 김영삼.김두한 의원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온갖 협박과 회유가 들어왔다. 나는 자유당 측의 테러를 피하기 위해 동가숙 서가식(東家宿 西家食)하며 어려운 시간을 넘겨야 했다. 이리저리 숨어다니며 위험을 피하고 있던 어느 날, 피치 못할 일로 집에 들러야 했다. 그 다음날 새벽 육척 장신의 한 사나이가 대문을 두드렸다. 깡패조직인 동대문파의 우두머리로 일제 때 명성을 떨친 자유당의 행동대원, 김사범이었다. 처가 태연한 얼굴로 문을 열며 "추운데 어서 들어오세요. 이 새벽에 웬일이세요"라고 묻자 김씨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돌아갔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김사범은 "민 의원을 해치우라는 지령을 받고 갔는데 부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약해져 그대로 돌아섰다. 내게 지령을 내린 사람에게는 집에 가보니 민 의원이 없더라고 거짓 보고를 했다"고 실토했다. 김씨는 낭만시대의 주먹이었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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