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25와 이승만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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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의 11월분 일기가 분실되어 이당시 내가 국외로 보낸 서신자료를 참고로 12월2일까지는 기억을 되살려 생각나는대로 몇가지 사실을 적고자 한다.
12월3일부터 내 일기는 다시금 이어진다.
나는 지금 비무장서재에 앉아 33년전에 내가 쓴 편지들을 보면서 감회어린 옛 추억을 더듬고 있다.
33년 후에 내가 다시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한 1950년 11월4일 「올리버」박사에게 보낸 내 편지를 보며 나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2주일 걸려 복구>
교통부가 한강을 가로지르는 철로를 복구 가설하였는데 한강모래사장과 물위를 지나는 이 철로는 모래주머니 받쳐져 만들어졌다.
처음에 미국사람들은 이 철도복구 계획을 말도 안되는 황당무계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차차 일이 진척 되는 것을 보자 관심을 가지고 장비도 빌려주고 도와주게 되었다.
두주일도 안걸려서 한강위에 군선철로가 복구되어 완공을 보자 대통령과 나는 첫 번기차가 건너오는 것을 보러갔다.
그토록 적은 재료들을 가지고 그런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낼수 있다니 정말로 놀랍고 감탄할수밖에 없었다. 거기에서는 모래와 주머니와 노동이 가능했을 뿐이다.
이 세가지가 모두 함께 합하여 강을 가로지르는 철로를 가설하는데 도움이 됐던 것이다.
그런데 단 한사람의 신문기자도, 미국인이건 한국인이건 이 사실을 주목해서 다음날 신문에 낸 사람은 없었다.
다만 몇사람의 미국인들과 이 일을 도와준 미국군 대령이 이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많은 사진을 찍었을 따름이었다.
미군대령은 우리가 기차가 건너오는 것을 보러온데 대해 무척 기쁘게 생각하며 큰 상을 받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실은 며칠전 한강 인도교가 미군수송기로 공수 공급되는 알루미늄합금골재로 복구 가설되는 공사광경은 신문이 크게 보도하고 있었다.
나는 11월8일「올리버」박사부인에게 다음과같은 편지를 보냈었다.

<올리버 부인에 편지>
『친애하는 「올리버」 부인께.
10월23일에 보내주신 편지 감사히 보았읍니다.
나는 이인수씨에 대해 더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거기에 가까이 사는 사람에게 간접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고 아무도 난처하게 하지 않고 전해달라고 부탁하신 돈을 전할수 있겠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무엇이든 확정되는 대로 알려드리겠어요. 아뭏든 가능한대로 영수증을 받고 돈을 전하도록 할 작정입니다.
부인께서는 「문.리」또는 이문산이라고 불렸던 분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문산씨부인은 공산당에게 학살당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이문산씨는 납북되었다는 말도있고 붙잡혀가서 총살당했다는 말이 있어 확인할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공산당에게 협력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의 집은 불태워졌고 부인은 총살을 당했읍니다.
다행히 그댁 며느리는 이웃에 숨어서 어린애와 함께 생존해있다고 합니다.
그쪽 어느 병원에선가 의학수련을 받고있는 그의 아들 이씨를 만나거든 이소식을 꼭 좀 전해 주십시오.
만일 「올리버」박사께서 다음에 워싱턴에 가시게되면 「올리버」 박사님 책의 서평을 쓴 가톨립잡지에 대해서 장대사님께 말씀을 드리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천주교신자인 장대사는 이 잡지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혹시 알지도 모르니까 한국실정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밝혀주도록 한 두마디 할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네루」수상에 대한 기사를 동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통령은 「네루」수상에 대한 견해를 여러번 피력하려고 했는데 아뭏든 아직 손대지못하고 있었읍니다.
인도가 한국문제를 거중 조정하겠다고 나섰을때 대통령은 「네루」 수상이 잘 알지도 못하는 다른나라 국민들의 일에 참견하러 들기 전에 자기나라를 통합하는 일에나 힘쓰도록 하라고 성명하는 뉴스를 타자해 놓은적이 있읍니다.
지금쯤 미국 시찰여행을 하고있는 변영태박사를 만나셨을줄로 생각합니다.
변박사에게는 상당히 드릴있는 여행이 돨것으로 생각되며 그분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리치먼드」양이 변박사를 라디오 인터뷰나 특별 프로에 나가도록 주선할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변박사는 우리나라를 위해 그런일을 제대로 해낼수있는 사람입니다.
이기붕씨부인이 1주일후쯤 미국으로 떠날 예정인데 박사님 내외분을 찾아가 뵙도록 부탁했읍니다.
두내외분과 가족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비오며. 『프란체스카.리」배,』
나의 친정어머니가 11월9일 별세하셨다는 기별이 왔었다.
6·25전쟁이난후 우리내외와 우리나라를 위해 줄곧 금식기도를 하며 밤낮으로 걱정을 하다 돌아가신 우리어머니, 막내딸인 나를 먼나라로 시집 보낸후 그토록 나를 보고싶어 하셨는데 17년동안 한번도 못만난채 그냥 세상을 떠나셨다.

<17년동안 못만난채>
전쟁이 끝나는대로 나는 꼭 찾아가 뵈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제는 영영 어머님을 뵐수 없게 된것이다.
어머니는 틈만나면 내사진을 한없이 들여다 보는 것이 일과였다는 말을 들을때 나는 가슴이 미어질듯 아팠다.·
대통령은 나에게 어머님 장례식에 다녀오라고 권고했으나 나의 마음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엇갈렸다. 마음 내키기에는 모든것 잊어버리고 달려가서 고향의 언니나 친지들과 함께 울기도하고 회포라도 풀고 싶었다.
그러나 엄청난 전쟁을 치르며 주야로 쉴사이도 없이 나라 일에 골몰하고 있는 대통령과,한시라도 그 곁을 떠나서는 안될 나의 위치를 생각하니 여러날이 걸릴 머나먼 여행길을 훌쩍 떠날수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가는것을 포기한채 바쁜 나날의 일과에 묻혀 슬픈 마음을 달래는 길밖에 없었다.
미제8군의 「세리」목사와 미공군의「월버튼」목사가 각각 1천달러씩 2천달러를 한국고아들을 위해 써달라고 대한적십자사에 기증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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