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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박근혜, 더 이상 출마할 선거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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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논설주간

“난 더 이상 출마할 선거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듣고 싶은 메시지가 엉뚱하게도 태평양 건너에서 날아왔다. 발신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지난달 21일 신년 국정연설에서 “남은 2년간 내 유일한 어젠다는 미국을 위해 최선이라고 믿는 것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내 스타일을 밀고 나가겠다는 결연한 각오가 느껴졌다.

 오바마는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다. 신년 국정연설 이후 주례 라디오 연설, 국정 로드쇼를 통해 필사적으로 국민과 의회를 설득하고 있다. 힘겨운 현실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국민의 손을 꼭 잡았다. “1년 내내 일해서 버는 1만5000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리고 최저임금 인상을 의회에 촉구했다. 부자 증세와 보편적 복지로 중산층 경제를 살리겠다고 선언했다.

 법인세율을 확 낮추고 자본소득세와 배당이익의 최고세율은 높이겠다고 했다. 아예 미국의 체질을 바꾸겠다는 대담한 승부수다. 중간선거 패배로 레임덕 위기에 몰렸지만 경제가 살아나고 반전의 카드를 던지면서 지지율 50%를 회복했다. 언론은 “오바마가 돌아왔다”고 평가한다.

 박 대통령은 너무 이른 시기에 레임덕 위기를 맞고 있다. 비선 실세 국정농단 의혹과 연말정산 소동이 문제였다. 지난달 12일의 신년 기자회견이 특히 아쉬웠다. 치열한 현실인식과 “난 더 이상 출마할 선거가 없다”는 결기, 소통의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다. 오바마 연설과는 달랐다. 박 대통령은 경제를 42번 언급했지만 며칠 뒤 월급쟁이들의 설렘을 분노로 바꾼 ‘13월의 세금폭탄’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하루하루의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겐 거창한 나라 경제의 형편이 잘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해를 구했어야 했다. 민심을 너무 몰랐다.

 건강보험료 소동도 불통과 무소신이 빚은 참극이었다. 이 나라에선 직장을 잃거나 은퇴하면 소득이 뚝 떨어지는데 건보료는 올라간다. 참 이상한 나라다. 1년 전 세상을 등진 송파 세 모녀는 공과금조차 못 낼 정도로 궁핍했다. 그런데도 매달 5만140원의 건보료 고지서는 지하 월세방으로 꼬박꼬박 날아왔다. 반면에 빌딩과 거액의 예금을 가진 부자는 자식이나 배우자가 직장을 다니면 피부양자로 등록해 한 푼도 안 낸다. 그래서 “상위 1%를 위해 전 국민이 깔창이 돼야 하느냐”는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1년에 6000만 건의 민원이 쏟아지고 억울한 사람이 도끼와 시너까지 들고 항의할 정도라면 나쁜 제도다. 그래서 보건복지부가 전문가들로 건보료 부과체계 개선 기획단을 만들어 1년 반을 준비했다. 750만 지역가입 세대의 80%인 600만 세대의 보험료가 줄어들고 45만 명의 고소득자가 보험료를 더 내는 개선안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구세주였다. 그런데 발표 하루 전날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백지화됐다.

 복지부 장관은 “준비 부족”을 이유로 들었고, 청와대 대변인은 “장관이 알아서 한 일”이라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어설프게 추진한 연말정산 변경의 후유증으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청와대가 지레 겁을 먹고 장관을 만류한 게 진실이다. 오죽하면 기획단장이 “정부는 개편 의지가 없다”고 비난하면서 사퇴했을까. 청와대는 오판했다. 여론은 압도적으로 개편을 지지했고 정부는 올해 안에 개선안을 내겠다고 말을 바꿨다. 국민의 절규를 외면한 불통과 무소신, 거짓말에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공무원연금 개혁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민간 기업 출신의 인사혁신처장은 공무원을 10년만 하면 연금을 주는 걸 정부안이라고 꺼냈다. 지금은 20년 이상 해야 연금이 나온다. “공무원 앞잡이”라는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국가재정 파탄을 막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개혁을 독려하고 있는데 이런 해괴한 안이 나왔다. 내부 소통도 먹통이 된 것인가.

 이젠 박근혜 스타일을 꺼낼 때가 됐다. 나는 청와대 밖에 있던 시절 박근혜의 치열한 현실인식과 열정을 기억한다. 박근혜는 고도성장기인 아버지 박정희 시대와는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버지 시대에는 성장이 고용으로 연결됐지만 지금은 달라졌기 때문에 성장률이 아닌 고용률로 경제를 관리하겠다고 예고했다. 국민행복을 위해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박 대통령은 지금도 “복지는 미래를 위한 소중한 투자”라며 일관성을 지키고 있다. 박근혜 패러다임은 여전히 유효하다.

 눈앞의 지지율은 잊어버리고 초심을 살려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오바마가 “나는 두 번의 대선에서 이겼다”고 했지만 박근혜도 불리한 대선에서 승리했다. 무엇이 두려운가. “난 더 이상 출마할 선거가 없다”는 결기와 현실을 만나려는 소통의 노력이 박 대통령에게도 필요하다.

이하경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