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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내 친구] 중. 교실에서 법의식 싹 틔우는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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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도쿄 쓰쿠바대학 부속중학교에서 다치 준지 교사와 학생들이 '당신도 재판관' 수업 중 토론을 벌이고 있다. 문병주 기자

지난달 6일 오후 도쿄 쓰쿠바(筑波)대학 부속중학교 종합학습(한국의 특별활동에 해당) 시간.

학생 28명이 3학년 B반 교실로 모여들었다. 칠판에는 '당신도 재판관'이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각자 한 가지씩의 법 관련 주제를 선정해 연구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야사가 조쇼(15)군은 신문 스크랩을 제시하며 '소년범의 재발 이유'를 연구해 보겠다고 말했다. '재판관과 검사의 지위'등 다소 어려운 과제를 선택한 학생들도 있었다. 다치 준지(館潤二) 교사는 "학생들에게 문제의식을 스스로 갖게 하기 위한 과제"라고 말했다. 이어 가상의 상황을 주고 유.무죄를 판단하게 하는 '법정 시나리오'수업이 시작됐다.

다치 교사가 미리 준비해 나눠준 이날 소재는 '아기 돼지의 늑대 살해 사건'. 늑대에게 어미를 잃은 아기 돼지가 늑대를 유인해 죽인 뒤 먹어버린다는 설정이다. 학생들에게는 "과연 돼지에게 살해죄가 적용되는가"와 "사체 훼손죄가 적용되는가" 등 두 개의 질문이 던져졌다.

학생 4명씩 7개 조로 나뉘어 각자 늑대, 아기 돼지, 증인(늑대 어미), 검사의 역할을 맡아 40여 분간 난상 토론을 벌였다. 조별 발표에서 모도야 마리고(15)양은 "돼지가 도망가지 않고 집에 침입하는 늑대를 기다렸다는 것은 계획적 살인이라는 방증"이라며 살해죄가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7개 조 중 4개 조가 살해 혐의를 인정했다. 사체 훼손 혐의는 7개 조 모두가 인정했다.

만다니 마리(15)양은 "여러 상황 설정을 하고 토론하는 게 재미있어 이 수업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 정규수업에 법 교육 접목=현재 일본에는 법 과목이 정규 수업에 포함돼 있지 않다. 전문가들은 국민적 관심이 법보다는 정치.경제 분야에 더 쏠려 있기 때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쓰쿠바부중을 포함, 지난해부터 종합학습 시간에 법 교육을 시범 실시 중인 도쿄 지역 8개 중.고등학교가 주목을 끄는 이유다. 이들 학교는 2003년 7월 법교육 활성화를 위해 법무성 주도로 발족한 '법교육연구회'소속 교사들이 근무한다.

일본 법 교육의 목표는 민간단체가 주도하는 미국의 '스트리트 로(Street Law.생활법)'와는 달리 학교(교실) 정규 수업으로 정착시키는 것이다. 이들 학교의 실험이 성공하면 전국적으로 법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법교육연구회 소속 교사들은 "법을 잘 알면 사소한 분쟁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성숙한 민주시민으로 살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해 줄 것"이라며 체계적 법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법무성 마루야마 가유(법교육추진협의회 교재개정검토위원) 검사는 "이 과목, 저 과목에 조금씩 끼여 있는 법 관련 내용을 정규 과목으로 일원화하는 것이 현안"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추진 중인 사법제도 개혁과도 법 교육은 맞물려 있다. 법무성 우에키 가쓰히코 사법법제과 사무관은 "2009년 도입되는 재판원 제도(참심제)에 대비해 성인들에게 법적 판단 능력을 키워주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판원 제도는 중대한 형사사건에 만 20세 이상의 시민이 참여하는 제도다. 원칙적으로 시민 재판원 6명과 현직 재판관 3명이 재판과정에 참여하며 유무죄는 물론 형량도 협의해 결정한다.

◆ 판.검사들도 적극적=도쿄지방법원 재판소는 종합학습 수업내용에 들어 있는 재판소 방문과 모의 재판을 적극 지원한다. 초.중.고 및 일반인에 따라 차별화된 방문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학생들이 소송 주체로서 법정에서 모의재판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대학생과 일반인에게는 '민사재판 법정가이드 투어'를 마련, 2003년에만 135명의 재판관을 자원 봉사자로 투입했다.

재판관들은 중.고교의 요청이 있으면 직접 학교로 나가 재판업무 등에 대해 강의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해에 150명의 민사부 재판관이 이 같은 현장파견제도에 자원했을 정도로 '열린 재판소'만들기에 적극적이다.

검찰은 형사재판 방청프로그램이나 이동교실 프로그램을 운용해 국민에게 사법제도에 대한 직접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민간이 나서야 법 교육 제대로 돼"
일본에 법 교육 첫 도입 에구치 교수

도쿄 쓰쿠바대 에구치 유지(江口勇治.인간종합과학연구과.사진) 교수는 1980년대 일본에 '법 교육'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지난달 5일 쓰쿠바대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변호사.학자 등 비정부기관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법 교육의 활성화가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법 교육의 필요성을 주창한 계기는.

"어렸을 때부터 법을 잘 이해하고 적응한다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필요한 법적 다툼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2009년도에 도입되는 재판원 제도(참심제)가 제대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중.고교 시절부터 관련 지식이나 법적 판단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

-미국.유럽식 법 교육과 다른 점은.

"미국.유럽의 경우 각계 각층의 단체와 개인이 자발적으로 법 교육에 앞장서 왔다. 일본은 교과 과정의 틀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법 과목이 따로 분리돼 있지 않지만 선택학습 시간 등을 이용해 일부 학교에서 일선 교사가 법 관련 수업을 하고 있다."

-정부와 일선 학교의 역할 분담은 어떻게 되나.

"개인적으로는 법무성이나 문부과학성이 아니라 현장 교사나 학생들의 자발적 필요에 따라 법 교육이 이뤄지기를 기대했지만 지금까지는 그렇지 못하다. 시작은 정부가 주도하고 차차 현장 교사 등이 필요성을 느껴가는 방식이 일본 현실에 맞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중.고교생을 위한 법 교육 프로그램은 어떤 게 있나.

"통일된 프로그램은 없다. 각급 학교나 변호사협회, 판.검사 등 다양한 부문에서 각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시행하고 있다. 법무성이나 문부과학성이 학교 법 교육의 큰 틀을 제시할 때 체계가 잡힐 것이다."

-법 교육에 대한 교사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법은.

"지금까지 교사들은 입학시험에 나오는 법률지식 정도만 관심을 가졌다. 법 교육이라기보다는 입시교육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법 관련 내용을 분리해 입시과목화하는 게 법 교육을 신속히 보급시키는 방법일 수 있다."

-한국은 법무부 주도로 법 교육 활성화를 추진 중인데 유의할 점은.

"일본처럼 한국도 법 교육의 역사가 짧다. 일본에선 학자와 변호사들이 법 교육 필요성을 적극 주창하고 연구한다. 한국에서도 민간이 나서서 공감대를 형성해가야 한다."

일본 법 교육 본궤도 오르기까지
변호사들 나서 10년간 뛰었다

일본에서 학생과 시민을 상대로 한 법 교육은 변호사들이 주도하고 있다.

일본 사회가 법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 쓰쿠바대학 인간종합과학연구과 교수인 에구치 유지 교수와 일본변호사연합회(일변련) 스즈키 히로부미 변호사가 선구적 인물로 꼽힌다.

에구치 교수는 미국의 '스트리트 로(Street Law)'를 모델로 한 법 교육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스즈키 변호사는 이를 현실에 접목하는 데 앞장섰다.

일변련은 93년 스즈키 변호사의 제안으로 정기총회를 열고 '법 교육의 충실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를 계기로 법학자.변호사.교사를 중심으로 법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10년 뒤인 2003년 3월 일변련은 법무성 등에 '시민을 위한 법 교육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시민에게 법적 권리를 알고 지키는 능력과 사회적 책임을 질줄 아는 시민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올바른 법 교육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법무성은 같은 해 7월 '법교육 연구회'를 설립하고 본격 지원에 나섰다.

각 지역의 변호사협회도 법 교육 활동에 참여, 중.고교 교사를 대상으로 법 교육 연수와 특강 등을 실시하고 있다. 일변련이 올해 5월 조사한 결과 전국 52개 지역 변호사회 중 35개 변호사회가 자체적인 법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요코하마 변회 무라마추 쓰요시 변호사는 "소속 변호사 800여 명 중 8년차 미만의 젊은 변호사 30여 명이 고등학교를 찾아 특강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만 요코하마의 21개 중.고교를 찾아 교실 수업 14차례, 재판소 견학 12차례, 형사 모의재판 3차례 등을 실시했다고 한다.

전국 2만여 변호사 중 500여 명이 이런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일변련은 추산한다. 일변련 소속 '시민을 위한 법교육위원회' 위원장 후루이 아키오 변호사는 "법교육위원회는 순수 자원봉사 차원에서 조직된 것으로 봉사활동에서 기쁨을 찾는 자발적 모임"이라고 설명했다.

일변련의 장기적 목표는 모든 시민이 활용할 수 있는 종합 법률 지식센터를 설립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법 교육 인터넷사이트를 만들고 법 교육 자료를 수집 중이다. 현장 교사들이 필요로 하는 강의 자료와 내용 등을 공급하기 위해서다.

◆특별취재팀=조강수.하재식.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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