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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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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그해 여름 일본 아오모리현의 한 어부가 해안에서 검은 비닐 가방을 건져 올렸다. 가방에는 현찰 30만 엔과 신사복.신분증 등이 들어 있었다. 신고를 받은 일본 경시청은 가방 주인공인 재일 한국인 유학생 이용씨를 체포했다. 당시 아사히 신문은 '와세다 대학원생이 북한 공작원'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북한 공작원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경시청은 이씨를 외국인 등록 위반 혐의 등으로 체포했다. …한 달 전 이씨는 '논문을 쓰고 오겠다'며 아파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비닐 가방이 발견될 무렵 '바다에 빠졌다'며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실이 발각됐다. 경찰은 퇴원하는 그를 체포했다. 이씨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경시청은 그가 북한으로 몰래 출국해 그곳에서 스파이 교육을 받은 뒤 다시 일본으로 잠입해 출입국 관리령 위반 혐의가 짙다고 보고 있다…." 공안 사건 특성상 경시청은 더 자세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일본 당국은 그를 추방했다.

그런 이용씨가 37년 만에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8.15 통일대축전에 초청된 것이다. 이날 한겨레 신문은 '친북인사 사슬… 38년 만의 귀국'이란 1면 기사에서 그를 '민주화.통일에 앞장선 인물'로 보도했다. 이씨는 스웨덴으로 추방된 이유를 5.16 군사 쿠데타를 비난하는 성명을 주도한 탓으로 슬쩍 바꿔치기했다. 스스로 "남쪽의 국가보안법으로 보면 내가 간첩일 수 있지만…"이라 인정하면서도 "어디까지나 민족 자주와 화해, 통일을 위한 것"이라고 우겼다. "여전히 반쪽 조국이란 게 아쉽다"고도 했다.

북한 공작원이 슬그머니 민주.통일운동가로 둔갑하는 세상이다. 중앙정보부 고문으로 조작된 간첩이라면 모른다. 일본 경시청이 밝혀내고 아사히 신문에 보도된 북한 공작원이었다. 그런 인물이 통과의례도 없이 통일운동가로 대접받고 있다. 초청 비용 또한 국민 세금인 남북협력기금에서 지원받았고, 동아일보 출판부는 자서전 출판까지 검토 중이라 한다. 같은 날 한겨레 신문 2면에 실린 기사가 공교롭다. 국가정보원 전직 간부들이 도청 사건으로 줄줄이 조사받는 내용이다. 북한 공작원 출신은 활개치고 간첩 잡는 정보요원들은 쇠고랑을 차고…. 세상이 좋아진 걸까, 나라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까.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