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송정…』을 보고 김종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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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시류에 편승한 통속영화, 국적을 알 수 없는 저질영화가 범람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일송정 푸른 솔은』과 같은 <좋은 영화>를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었다. 그것은 잊혀져 가는 우리의 뿌리에 대한 일깨움이요, 날로 위축돼 가는 연출자의 목소리를 확인한데 대한 반가움이다.
내가 이 영화를 좋게 본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였다. 첫째는 청산리 싸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도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독립투사의 무용담에 앵글을 맞추지 않고 꽃다운 나이로 산화해간 이름 없는 젊은 독립전사들이 빼앗긴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했으며 어떻게 죽어갔는가를 그려나갔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이장호 감독의 변화를 꾀한 끈질긴 모색과 잠재력이다. 이 연출자는『바람 불어 좋은 날』 이후 제나름의 현실수용과 표현의 확산을 통해 꾸준히 연민의 미학을 다져오고 있지만, 『일송정 푸른 솔은』의 경우는 사회와 인간의 문제를 민중과 역사의식의 눈으로 받아들이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소외된 소시민의 애환을 풍격도적인 삶의 방법으로 추구해온 지금까지의 작품경향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큰 일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독립군 전사 태유영(한국독립운동사에 나오는 최린걸역)과 동학란에 가담했다가 피신한 선친의 엎을 이어 독립군이 된 농군 윤량하, 그리고 국수장사를 하면서도 독립군을 도와 헌신하는 함격도 처녀 이보희와 같은 평범한 인물들이 핵심을 이룬다.
그러나 이들은 북간도 길림성 왕성현을 본거지로 활약하는 엄연한 주연급 영웅들이다. 그들은 김좌진장군의 지휘 아래 일본의 대병력과 싸워 이겼으나 그 보람도 없이 망국의 한을 간직한 채 죽어간다.
특히 판소리와 품파조의 구슬픈 가락, 그리고 내레이터로 등장하는 청산리전투의 유일한 생존자 이우석옹의 육성이 농축되어 이 작품의 저항정신은 그 어떤 구호보다도 맹렬한 호소력을 지닌다.
그런데 아직 여리긴 하나 이보희라는 강한 체취의 신인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의 수확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 역시 흔히 대작이 범하기 쉬운 산만한 구성, 피상적인 인물에의 접근 등 보다 함축과 밀도가 요구되는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 함에도 불구하고『일송정 푸른 솔은』은<국민영화>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또 평가받아 마땅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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